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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동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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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전문가
보가9 그래픽 디자인 및 영상 편집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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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여성 참정권운동이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08년 3월 8일, 1만 5천여 명의 미국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러트거스 광장에 모여 10시간 노동제와 작업환경 개선,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날이다.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차 여성운동가대회에서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제트킨의 제창에 따라 결의하였다.이후 여성들의 국제적인 연대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각국에서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남녀차별 철폐, 여성빈곤 타파 등 여성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해 2019년 현재까지 매년 3월 8일을 기해 세계적으로 기념대회가 이어져 왔다.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작업장에서의 화재로 숨진 여성들을 기리며 궐기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당시 노동자들은 근로여건 개선과 참정권 보장 등을 요구하였다.이후 유엔은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로 지정하고 1977년 3월 8일을 특정해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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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판소리는 언제부터 자리잡게 되었나?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판소리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영조 30년(1754)에 유진한이 지은 춘향가의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숙종 시대에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판소리가 발생할 당시에는 한 마당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서 판소리 열두 마당이라 하여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배비장타령,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무숙이타령,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그 수가 많았다. 그러나 현실성없는 이야기 소재와 소리가 점차 길어지면서 충, 효, 의리, 정절 등 조선시대의 가치관을 담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만이 보다 예술적인 음악으로 가다듬어져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판소리가 우리 역사와 희노애락을 함께해온 우리문화의 정수로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제2차 무형유산 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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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평민으로 태어났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활약해 차근차근 전공을 쌓았고 나중에 노부나가가 미츠히데의 반란으로 죽게 되자 미츠히데를 처단해 권력을 장악한 뒤 전국시대를 끝내고 일본 열도를 통일합니다.열도 통일 후 임진왜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였고 이후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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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병자호란때 승리한 전투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임진왜란으로 우리나라와 명나라가 왜군과 싸우고 있을 때 만주에서는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추장(酋長) '누루하치'가 나타나 팔기(八旗)의 강병(强兵)으로 여진(女眞)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광해군 8년에는 국호(國號)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만주의 태반을 그 손아귀에 넣었다. 이렇게 북쪽에서 여진족(女眞族) 즉 만주족(滿洲族)이 세력을 떨치자 우리로서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고 명나라도 큰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위협은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0년 전에 '누루하치'가 인근의 부족을 정복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직후부터 성곽의 수축과 축성 사업은 비단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는 데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의 만주족의 대두에 대비하기 위한 데도 있었다.더욱이 후금이 건국되고 나서는 우리로서 그들에 대한 대비책이 시급하고도 중요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도성의 수축과 기타 지역의 축성론(築城論)이 크게 대두하게 되었으나,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것은 도성보다도 그 외진(外鎭)인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화성(江華城)에 대한 것이 더 큰 것으로 등장되었다. 앞서 선조 28년(1595) 12월에 광주인(廣州人) 권응원(權應元)에게 실직(實職)을 주어 남한산성을 수리하게 하고 적속둔병(積粟屯兵)의 일을 맡게 한 일이 있더니, 인조 2년(1624) 3월에는 왕이 삼정승(三政丞)과 비변사(備邊司)의 제신(諸臣)을 인견(人見)하고 남한산성과 강화성의 수축을 논의하였으며, 그 결과 먼저 강화성을 수축하고 이듬해에는 남한산성을 수축하기로 결정하였다.이러한 결정은 이괄(李适)의 난(亂)이 있은 직후에 있었던 것이니만큼 그것으로부터 받은 충격도 컸을 것이 짐작되나, 궁극의 목적은 만주족(滿洲族)에 대한 대비책에 있었던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이러한 결정으로 강화성과 뒤이어 남한산성의 수축이 착수된 것 같다. 그것은 인조 3년(1625) 2월에 호조(戶曹)에서 남한산성 부역(赴役)의 승군(僧軍)을 감하여 그 일부를 단천(端川)에 보내어 은연(銀鉛)을 채취케 할 것을 청하였고 또, 그해 6월에는 완풍군(完豊君) 이서(李曙)의 건의로 남한산성에 행궁(行宮)을 짓게 하였으니, 이러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그것이 짐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조 2년 경부터 강화성과 남한산성의 수축이 착수되어 그 성과는 어느 정도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청나라의 동태가 미묘하여지자 남한산성의 수비책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되었다. 즉, 인조 14년(1636) 7월에 남한산성수비사(南漢山城守備使) 이시백(李時白)의 건의로 남한산성의 입방군(入防軍)을 12,700명으로 하고 경기도 소속의 군은 그 해당의 수령(守令)과 장관(將官)을 남한산성으로 불러들여 그 신지(信地)를 획정(劃定)하는 한편, 원주(原州) · 안동(安東) · 대구(大邱)에 각각 종사관(從事官)을 보내어 그 군을 사열케 하여 형세에 따라 남한산성에 동원되도록 조치를 취하게 하였던 것이다.이러한 만주족 침입에 대비하는 성곽의 수축과 축성 사업은 비단 도성과 그 외진 뿐만 아니라, 지방성(地方城)에 있어서도 상당한 추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강화성과 남한산성의 수축과 때를 같이하여 인조 2년 11월에는 평양성(平壤城)의 수축을 끝내고 별조도감(別造都監)과 군기소(軍器所)에서 만든 대포 수십구를 평양성에 보내어 배치케 한 사실로도 알 수 있으나, 이러한 지방성의 수축은 비단 평양성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상당수에 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이렇게 후금과의 관계가 미묘하여지자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서울과 그 주변 그리고 지방성의 수축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책에도 불구하고 청 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청군(淸軍)은 드디어 인조 14년(1636) 12월 9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남하하여 그 선봉은 벌써 12월 15일에 남한산성에 이르고, 그 대신(大臣) 담태(譚泰)의 군은 아무런 저항없이 서울에 입성하여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에 이르렀으며, 청 태종은 이듬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 이르러 군 20만을 집결시키고 산성 동쪽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산성 안을 내려보기에 이르렀다.거기에 앞서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는 소식이 서울에 전하여지자 인조 14년 12월 14일에 판윤(判尹)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 부제학(副提學)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삼고 강화유수(江華留守) 장신(張紳)으로 하여금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게 하여 강화(江華)를 지키게 하는 한편,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을 시켜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세자빈(世子嬪) 강씨(姜氏)와 원손(元孫) 그리고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平大君)을 안내하여 먼저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그리고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서울을 지키게 하고 인조는 그날 밤에 강화로 떠나기로 하였다.그리하여 인조는 14일 밤에 궁궐을 나서 숭례문(崇禮門)까지 나왔으나 그 때 청군의 선봉은 벌써 홍제원(弘濟院)에 이르고 그 일부는 양천(陽川)으로 나가 한강을 차단하고 양철평(良鐵平, 마포 건너쪽 정천평(貞川坪)?)에 진을 쳐 강화로 가는 통로를 막았다. 거기에 인조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세자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수구문(水口門)으로 나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조가 도성을 떠나자 도민(都民)들은 앞을 다투어 피난길을 떠나는 바람에 부자, 형제, 부부가 서로 짝을 잃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는 것이다.[[註24]이렇게 14일 밤에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는 영의정 김류(金**) 등의 '남한산성은 고성(孤城)으로서 외부로부터 원조가 어렵고 또 병량(兵糧)과 마초(馬草)의 준비가 부족하여 성을 보존하기가 어렵다'라는 주장으로, 다음날인 15일 아침에 산성을 떠나 강화로 가다가 얼음이 덮이어 더 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조는 훈련대장(訓練大將) 신경진(申景色) · 총융사(摠戎使) 구굉(具宏) · 어영대장(御營大將) 이서(李曙) ·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 · 어영부사(御營副師) 원두표(元斗杓) 등으로 하여금 1만 3천의 군대로서 성첩(城堞)을 지키게 하고,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 · 부원수(副元帥) 신경원(申景瑗) 그리고 제도(諸道)의 관찰사(觀察使)와 병사(兵使)에게는 근왕(勤王)의 군사를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그 때 남한산성의 형세로는 관향사(管餉使) 나만갑(羅萬甲)의 보고에 따르면 미(米) · 두(豆)가 함께 18,000석(石), 피곡(皮穀)이 5,800여석으로 그것은 산성 안의 인원이 50일간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되는 것이며 또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신국(金藎國)의 보고에 따르면 군사의 수가 14,000에 가깝고 재신(宰臣) 이상이 70명, 당상관(堂上官) 이상이 50여명, 당하관(堂下官) 이하가 270명이 되었다는 것이다.[[註25] 이렇게 청군의 포위로 고립된 남한산성은 날이 갈수록 고난을 더하여 갔다. 안으로는 병력 · 장비 · 식량 등 인적 · 물적 부족에다가 혹한이 몰아닥쳐 그 참상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밖으로는 각지에서 원군(援軍)이 남한산성으로 몰려들었으나 청군에게 모두 패배를 당하여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명나라의 원군도 그들의 국내 사정이 심상치 않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거기에서 산성 안에서는 차츰 강화론(講和論)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으나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상헌(金尙憲) · 이조참판(吏曹參判) 정온(鄭蘊) 등은 이를 반대하고 주전론(主戰論)을 폈다. 그러나 주전파(主戰派)에 별로 신통한 방도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인조는 좌의정(左議政) 홍서봉(洪瑞鳳) · 호조판서 김신국 등을 청영(淸營)에 보내어 강화를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청 태종은 인조가 친히 산성에 내려와서 항복할 것과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의 맹약을 저버린 주모자 2, 3명을 보내라는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치욕적인 요구에 대하여 우리로서 아무리 전세가 불리하다 하더라도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1월 22일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그 곳에 피난갔던 빈궁과 왕자 이하 200여명이 청군에게 잡히어 남한산성 밑으로 호송되어 왔다. 그 때 강화의 수비군은 지리상의 유리한 점만을 믿고 방비를 소홀히 하다가 급습한 청군에 한 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검찰사 김경징 · 부사 이민구 · 강화유수 장신 등은 배를 타고 도망치고 전우의정 김상용 · 전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 등은 스스로 불질러 자살하였으며 많은 부녀자들이 순절하였다.이러한 강화(江華) 함락의 사실을 확인한 인조는 더 항전할 용기를 잃고 강화(講和)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전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홍서봉(洪瑞鳳) · 최명길(崔鳴吉) · 김신국 등을 청영에 보내게 되고 한편 청사(淸使) 용골대(龍骨大) · 마부태(馬夫太) 등이 산성에 오게 되어 마침내 강화조건에 합의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결정된 중요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은 청에 대하여 군신(君臣)의 예를 행할 것 ② 조선왕의 장자(長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제2자(봉림대군), 제대신의 자를 심양(瀋陽)에 보내어 인질로 할 것 ③ 조선은 신구(新舊)의 성원(城垣)을 선축(繕築)치 말 것 등이었다.조선으로서는 이러한 조건은 이보다 더 큰 치욕이 없었으나 그를 받아들일 수 밖에 도리가 없었고, 인조는 청의 강요에 마침내 세자를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성하지맹(城下之盟)을 행하였다. 그리고 인조는 그날로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월 30일로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지 46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한편 청 태종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나서 척화론(斥和論)의 주동자 홍익한(洪翼漢) · 오달제(吳達濟) · 윤집(尹集) 등을 잡아 심양으로 돌아갔다.이렇게 우리는 일찍이 보기 드문 국난과 치욕을 당하였으나, 그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서울 도성의 형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조는 도성을 떠나기 전에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에 임명하여 도성을 수비케 하였다. 청군이 서울 근교 홍제원에 이른 것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떠나던 12월 14일이었다. 자칫하면 인조가 도성을 떠나기 전에 사로잡힐 우려마저 있었다. 이조판서 최명길 등이 홍제원의 청진(淸陣)에 가서 주육(酒肉)으로 그들 군사를 위로하고 출병(出兵)의 이유를 묻는 등 시간을 끌었다. 그 사이에 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지 2일만인 12월 16일에 벌써 청군의 선봉은 남한산성에 다달았고, 청 담태의 군대가 서울에 입성한 것도 그 사이의 일이었다.그것은 어떻든 유도대장 심기원은 청군을 맞이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성을 버리고 광릉(光陵)으로 물러났다. 이렇게 도성을 쉽게 청군에게 넘겨준 것은 심기원의 탓이라기보다도 남한산성 수비에 편중한 것이 더 큰 원인이라 하겠다. 도성 소홀은 심기원의 보고 내용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즉 심기원이 납서(蠟書)를 남한산성에 보내어 도성의 전황(戰況)을 '우리의 수비군은 270명에 불과하고 청군은 약 5, 6백명이 되나, 그들에게 화공(火攻)을 가하여 승리를 하였다'라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보고의 내용으로 보면 피차간 도성에는 치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로서 도성의 수비가 극히 소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심기원이 허황되고 과장된 전과(戰果)의 보고를 하여 상하(上下)로 하여금 놀라움과 분개를 금치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즉, 심기원이 초관(哨官) 이신민(李信民)을 시켜서 보내온 장계(狀啓) 가운데 도성 수비의 전과를 과장하여 조정(朝廷)을 기만하는 기미가 있어 보는 사람이 놀라움과 분개를 금치 못하였다는 것이며[[註28] 앞의 심기원의 납서 보고 가운데에도 전과를 과장한 것이 많았으나, 산성에서는 그 전과에 위안을 얻어 사기가 크게 떨쳤다는 것이다. 요컨대 병자호란 때도 임진왜란 때와 같이 도성이 한 때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점령될 때나 수복할 때 모두 심한 전투는 없었다. 그리고 청군의 도성 점령은 그 기간이 짧았고 그 병력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병자호란 때는 임진왜란 때에 비하여 도성이 입은 피해는 작은 것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兩亂)을 통하여 도성이 입은 피해는 상당히 큰 것이었으리라는 것이 짐작된다. 그 중에서 보아온 것과 같이 임진왜란 때 입은 피해는 그 난후에 상당한 복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병자호란 때 입은 피해는 병자호란의 화약(和約) 즉 정축조약(丁丑條約)으로 인하여 도성의 수축은 물론, 다른 성곽에 대하여도 수축을 할 수 없게 되어 상당한 기간 그 황폐를 방치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정축조약에 의해 조선은 신구를 막론하고 성원의 신축과 수축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 이전까지에는 성곽의 수축 또는 신축에 대한 논의도 잠잠하여졌고, 따라서 그 사업에 대한 기록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그것은 어디까지나 청의 압력에 의하였던 것으로, 우리 자체의 국방의 포기는 아니었다. 우리는 병자호란 때 겪은 치욕을 씻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썼던 것이다. 청과 화약을 맺은 인조 때만 하더라도 16년에 청이 명을 치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사(舟師, 수군(水軍))를 청하자 우리는 여러 가지 구실을 붙이어 기간을 끌면서 결국 그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또, 뒤에 의주목사(義州牧師) 임경업(林慶業)이 주사를 이끌고 청군과 더불어 명을 치게 되었으나 임경업은 명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19년에는 유림(柳琳)이 청군과 더불어 명의 금주성(錦州城)을 공격할 때 우리 군사는 명군에게 정확한 사격을 하지 않았는가 하면 헛총을 쏘았다. 또, 최명길이 임경업과 상의하여 비밀히 묘향산(妙香山)의 중 독보(獨步)를 명에 보내어 우리나라가 청의 강요로 하는 수 없이 군대를 냈다는 곡절을 밝히어 우리나라의 입장을 변명하였다. 그 사실은 뒤에 청에게 탄로되어 임경업은 명으로 망명하고 최명길은 청에 잡혀가는 바가 되었으나, 이러한 사실들은 국내적으로 성곽을 쌓고 국방력을 배양하지는 못하였어도 대외 활동을 통하여 청을 견제하고 그에게 항거한 구체적인 사실이 되는 것이다.이러한 청에 대한 항거는 효종 때 북벌계획(北伐計劃)으로 구체화 되었다. 즉, 효종은 봉림대군으로 있을 때 소현세자와 더불어 8년간이나 청의 서울 심양에 인질로 잡혀가 갖은 고역을 다 치뤘고 또 앞서 남한산성의 치욕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청에 대한 복수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즉위하게 된 효종은 이완(李浣)을 훈련대장(訓練大將)으로 삼아 군사를 훈련하고,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하여 청의 정벌을 의논하고 군비를 확장하며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을 계획하는 등 북벌(北伐)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우리 힘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고 더욱이 효종이 즉위한 지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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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증기의 발명가는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증기기관의 발명알고 보면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처음 발명한 것도, 그의 발명으로 단번에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와트의 증기기관을 산업혁명의 원동력으로 설명하는 편이 간단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대표적 영웅으로 산업혁명의 역사를 장식하게 되었다.에너지의 원천이 되는 자원으로는 석유, 석탄뿐 아니라 흐르는 물과 바다의 파도나 조석(潮汐)의 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할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법. 이런 자원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원동기(原動機)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대표적인 발명으로 널리 인정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와트가 증기기관을 처음 발명한 것도 아니고 그의 발명으로 단번에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와트의 증기기관을 산업혁명의 원동력으로 설명하는 편이 간단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대표적 영웅으로 산업혁명의 역사를 장식하게 되었다.와트 이전에 이미 증기기관은 사용되고 있었다. 열(熱)에너지에서 동력을 얻는 인간의 첫 중요한 발명품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그런 장치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은 이미 고대 그리스 로마 때에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헤로(Hero)의 증기구(蒸氣球)란 것이 그것으로, 공 모양의 양쪽으로는 분출구가 있어서 그 구멍에서 수증기를 뿜어내게 하여 공을 돌려주는 것이다.실제로 증기의 힘을 이용하여 일을 하는 장치로서는 이미 와트 이전에 벌써 광산에서 물을 퍼올리기 위해 널리 증기기관이 사용되고 있었다. 우선 들 수 있는 경우는 프랑스의 파팽(Papin), 영국의 세이버리(Savery)의 증기기관이다. 다음은 뉴커맨(Newcomen)을 거쳐 와트(Watt)의 증기기관으로 발전해 갔다고 할 수 있다.파팽(1647~1712)의 증기기관이란 실제로 만들어 사용되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과학자로 영국에서 활약했던 그는 1690년에 증기기관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그런 장치를 만들 수 있다고 예언했다. 수증기는 공기나 마찬가지의 탄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온도만 낮아지면 간단히 다시 물로 바뀌면서 공기의 성질을 잃게 된다. 따라서 화약을 사용하여 공기를 팽창시켜 진공을 만들고, 그것으로 물을 끌어올리는 장치를 만드는 것보다는 수증기를 사용한 기관을 만드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이다.피스톤 속에서 화약을 폭발시켜 가열된 공기가 빠져나가 부분적 진공을 만들면, 그 공간에 물이 따라 들어오게 한다는 호이겐스의 생각을 그는 화약 대신 수증기로 바꿔 놓았던 셈이다. 그는 이것을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장치로 만들어 보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재미있는 다른 발명으로 오늘날 기억된다. 바로 압력솥이 그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수증기의 압력을 이용하는 장치이니, 일종의 에너지 장치라 할 수도 있겠다. 에너지 이용의 역사에서 한 자락을 차지한다고도 할 만한 일이다.수증기는 물의 부피를 1300배나 팽창시켜 준다. 바로 그 굉장한 팽창력을 이용하자는 것이 파팽 이후 증기기관 발명자들의 생각이었다. 그 가운데 영국의 세이버리(1650~1715)는 실제로 광산에서 사용된 최초의 증기기관을 만든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그는 캡틴이란 칭호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게 붙여진 이 칭호가 그냥 무슨 ‘대장’노릇을 했다는 뜻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그럴 정도로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여하튼 그는 글을 많이 남겼는데, 그 가운데 “광부의 친구”(The Miner’s Friend)라는 글에 바로 그가 말하는 ‘불 엔진’(fire-engine)이란 장치가 설명되어 있다.오늘의 영어로는 ‘불 엔진’이란 말은 소방차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불 엔진’은 바로 증기기관이었고, 그래서 오늘날 그의 증기기관은 아예 ‘광부의 친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하튼 그는 커다란 공 모양 장치의 한 쪽에 길게 관을 연결하고 그 관의 아래 끝이 광산 안의 물 속에 들어가게 했다. 그 둥근 장치에 수증기를 가득 채운 다음 밖에서 찬물을 부어 공을 식혀주면, 그 안의 수증기는 몇 방울의 물로 바뀌고, 당연히 그 나머지 공간을 채우려고 아래쪽에 연결된 관으로부터 광산 속의 물이 솟아 올라가 공을 채워줄 것이다. 그 물을 비운 다음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 광산의 물을 퍼낼 수가 있다.이 장치는 원래 영국의 귀족으로 우스터 후작이던 다른 발명가 서머세트(1601~67)의 발명인데, 세이버리가 그것을 훔쳤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1652년에 이미 우스터 후작은 광산에서 물을 퍼올리는 증기기관을 설계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때 반왕국(反王國) 혐의로 2년 동안 런던탑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그 동안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가 증기기관을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주전자의 끓는 물이 뚜껑을 들먹여 주는 것을 보고부터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우스터 후작의 증기기관이 얼마나 그럴듯했던 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실제로 광산에서 사용된 것은 여하튼 세이버리의 것으로 알려졌다.이런 과정을 거쳐 세이버리의 증기기관은 다시 토마스 뉴커멘(1663~1729)에 의해 개량된다. 다트머스의 대장장이 뉴커먼은 이를 개량하여 훨씬 능률 좋은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1712년 더들리 카슬의 탄광에 설치한 뉴커멘의 증기기관은 1분에 12회 왕복운동을 하며 물을 퍼올렸는데, 그 힘은 약 5마력 정도였다. 세이버리의 증기기관이 1마력 정도로 평가되니까, 훨씬 힘 좋은 증기기관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뉴커멘 기관은 그 후 점점 금속가공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더 큰 실린더를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처음에는 지름 7인치 짜리 실린더가 고작이었지만, 1725년에는 29인치짜리로, 그리고 1765년에는 74인치짜리까지 대폭 커졌다. 그와 함께 증기기관의 마력(馬力)수가 크게 늘어났음은 물론이다.뉴커멘의 증기기관은 당시로서는 대성공이었다. 발명 직후 4년 동안에 8개국에 보급되었고, 그가 죽은 1729년까지 그의 증기기관이 유럽의 많은 나라에 퍼졌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뉴커멘의 일생에 대한 글에서도 그가 바로 주전자 뚜껑을 보고 증기기관을 발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는 것이다. 우스터 후작, 뉴커멘,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와트 세 사람이 모두 물 끓이는 주전자 뚜껑의 들먹이는 모습을 보고 증기기관을 발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는 말이다. 이 전설의 연속 현상만 보더라도 증기기관의 발명과 사용은 오랜 역사의 결과였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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