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6.25 전쟁은 어떻게 해서 끝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50년6월 25일 새벽4시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서 남침함.6월 26일 북한군 의정부 점령.6월 27일 북한 전차부대 일부가 서울 장악. (이승만 정부 대전으로 피난.)6월 28일 새벽3시 한강 인도교 폭파.7월 7일 유엔군 편성 (16개국)7월 30일 북한군 수원 점령.7월말 이승만정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정부옮김.8~9월 한국군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음.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월미도 탈환)9월 28일 서울 수복.10월 1일 한국군 38선 돌파.10월 20일 한국,유엔군 평양 점령.---------------------------------중국군 인해 전술 1950.10---------------------------------------------------------11월 유엔군. 두만강,압록강 도착.(몇일후 유엔,한국군 38선이남으로 다시후퇴.) 1951년1월 4일 북한군의서울 재점령3월 24일 다시 수복4월 11일 맥아더 해임.(리지웨이가 유엔군 총사령관자리를 이어받음.)4월 30일 북한군이 서울 우이동까지 진격 했으나 격퇴당함.6월 23일 북측의 정전제의~1953년 7월 27일까지 서로 싸움. 1953년 1953년7월 27일 휴전협정조인. 전쟁종결.1951.4.12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 장군 유엔군사령관 임명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 자신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지 않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겸미 극동군사령관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미 제8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6.25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1951.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북진하여 한만 국경선 가까이 도달함으로써 남북 통일의 일보직전까지 이르렀던 국군과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자 미국은 군사적인 수단으로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목적을 포기하고 정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편, 소련과 중공도 이런 사태를 인식하였으며, 마침내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정전의사를 표시 하므로서 전쟁을 중지하기 위한 양측의 합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Q. 독일어의 유래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칸디나비아어 등을 포함하며, 세계 인구 중 4억 이상이 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인도-유럽어족은 BC 2000년 무렵 분화현상을 일으켰으며, 그 결과로 생겨난 게르만 조어(祖語)는 BC l000년경에는 주로 발트해와 북해의 남안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 후 게르만 민족은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AD 1∼3세기경에는 광대한 지역에서 게르만제어(諸語)가 사용되었는데, 서 ·북 ·동의 3그룹으로 나뉘어 내려왔다. 그 중 서게르만어는 다시 2군(群)으로 대별할 수 있다. ① 5세기에 앵글 ·색슨 ·주트족(族)이 대륙으로부터 영국에 침입, 앵글로색슨 문화를 형성하면서, 그들의 언어인 고대영어는 이 섬의 켈트어(語)를 축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영어와 네덜란드 프리슬란트의 프리지아어의 두 언어가 그 하나인데 이들 두 언어는 공통의 조어인 앵글로프리지아어에서 유래된다. ② 다른 하나는 대륙의 원시 독일어인데, 고지방언(高地方言)과 저지방언(低地方言)으로 나뉜다. 고대 고지 독일어는 현대의 표준 독일어가 되었고, 고대 저지 독일어는 현재도 북독일 농민들 사이에 쓰이고 있는 저지 독일어가 되었다. 다시 네덜란드어와 벨기에의 북부지방에서 쓰이고 있는 플레밍어, 그리고 네덜란드의 이민이 남아연방에 전파시킨 아프리칸스어는 저지방언에 속한다. 현대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는 각각 고지 및 저지 프랑코니아 방언에서 발달한 언어이다. 북게르만어는 게르만어파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기록(2~8세기)을 가진 고대 노르드어가 동 ·서의 두 방언으로 나누어진 언어이다. 동방언군(東方言群)에는 덴마크어 ·스웨덴어 ·리크스몰이라고 하는 노르웨이 공용어가 있고, 서방언군에는 란스몰이라고 하는 노르웨이어 ·아이슬란드어가 있다. 동게르만어는 울필라스가 번역한 신약성서 일부에 전해지고 있는 고트어가 잘 알려져 있으나 사멸된 상태이다.
Q. 이준 열사의 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말기 순국열사. 함경남도 북청 출신. 1887년(고종 24) 초시에 급제, 함흥 순릉참봉을 지내고 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 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으나 사임하고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초대 평의장이 되었다.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98년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 1904년 일본이 침략전쟁의 일환으로 황무지개간권을 요구하자 송수만·원세성 등과 보안회를 조직, 이를 저지하였다. 또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조직, 을사5적을 규탄하다가 황해도 황주 철도로 유배되었다. 1905년 유배에서 풀려나 윤효정·양한묵 등과 헌정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하였고,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었다. 1906년 유성준 등과 국민교육회활동에 가담,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보광학교를 설립하고 한북흥학회를 조직, 지도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연합회의 소장으로 활동, 그해 6월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를 방문,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가지고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저지당하자 헤이그에서 자결하였다. 그동안 헤이그에 있던 유해를 63년 서울 수유리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으며, 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②번 구한국 말의 열사. 호는 일성, 해사, 청하이며, 함경 북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896년에 한성 재판소 검사보로 임명되었으나 중신들의 비행을 파헤치다가 면직되고, 독립 협회 평의장, 공진회 회장으로 항일 운동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로 가서, 의장을 방문하고 친서와 위임장을 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여 격분한 끝에 조국의 억울한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자결하였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으며, 그 이듬해에 유해는 헤이그에서 서울 수유리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