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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한아비34
산뜻한아비34

이준 열사의 업적이 궁금합니다.

이준 열사는 독립협회에 가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열사에 비해 학교 역사책이나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어떤 업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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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준열사는 17세에 한양으로 상경하여 형조판서 김병시, 흥선대원군과 교제하여 친분을 쌓고 북청으로 돌아와 29세에 함경도 국가고시에 장원급제한 후 조병식과 경학원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썼습니다.

      또 법관양성소를 졸업 후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임명되었으나 고관의 비행을 탄핵한 일로 높은 사람들의 심기에 거슬려 한달만에 면직되었습니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의장을 맡아 활동 중 친일파인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 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망명하고 1898년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1년만에 졸업하고 체포령이 해제되자 귀국하여 독립협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준은 1902년 부터 1904년까지 개혁당, 대안보안회, 대한적십자, 공진회 등을 설립하고 항일운동을 벌이다 체포되며 그 후 보광학교, 오성학교 등을 창립하여 교육에 힘쓰고 법안연구회, 헌정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갑니다.

      1905년 5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동감리교회의 전덕기 목사가 전국감리교 엡윗 청년 연합회를 소집하고,

      조성환, 최재학, 이동녕, 김구 등이 모여 조약 무효 상소 운동을 벌리고 이준은 조약 폐기 상소와 오적 격토문을 직접 작성해 올리는데 이 과정에서 5인 1조로 팀을 편성해 팀 별로 돌아가며 고종이 있는 궁궐을 향해 반복적으로 상소문 낭독을 하였는데 1조로 뽑힌 이준, 김구 등이 대한문 앞에서 낭독을 하다 일본군 제압으로 투옥됩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발발하자 서울 국채보상연합회의소를 설립하여 소장직을 맡아 모금 운동을 시작하고 4월 안창호,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등의 주도로 신민회가 결성되자 이준도 가입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습니다.

      1907년 6월 15일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 일제의 압력을 호소하기 위해 이위종, 이상설과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헤이그에서 지병이었던 뺨 종기가 재발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말기 순국열사. 함경남도 북청 출신. 1887년(고종 24) 초시에 급제, 함흥 순릉참봉을 지내고 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 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으나 사임하고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초대 평의장이 되었다.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98년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 1904년 일본이 침략전쟁의 일환으로 황무지개간권을 요구하자 송수만·원세성 등과 보안회를 조직, 이를 저지하였다. 또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조직, 을사5적을 규탄하다가 황해도 황주 철도로 유배되었다. 1905년 유배에서 풀려나 윤효정·양한묵 등과 헌정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하였고,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었다. 1906년 유성준 등과 국민교육회활동에 가담,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보광학교를 설립하고 한북흥학회를 조직, 지도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연합회의 소장으로 활동, 그해 6월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를 방문,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가지고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저지당하자 헤이그에서 자결하였다. 그동안 헤이그에 있던 유해를 63년 서울 수유리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으며, 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②번

      구한국 말의 열사. 호는 일성, 해사, 청하이며, 함경 북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896년에 한성 재판소 검사보로 임명되었으나 중신들의 비행을 파헤치다가 면직되고, 독립 협회 평의장, 공진회 회장으로 항일 운동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로 가서, 의장을 방문하고 친서와 위임장을 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여 격분한 끝에 조국의 억울한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자결하였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으며, 그 이듬해에 유해는 헤이그에서 서울 수유리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