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만주에서 무장 독립활동이..1919/20사이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봉오동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안무 장군이 이끄는 국민회군, 최진동 장군이 이끄는 군무도독부군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입니다.3일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30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퇴각하였고, 독립군은 전사자 4명, 부상자 10명이라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습니다.이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리로, 독립운동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청산리대첩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독립군이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일대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편성된 일본군 동지대 5,000여명과의 전투에서 3,000여명을 살상하였습니다.이 대첩은 독립군 전쟁중 빛나는 승리이며, 또한 독립군은 물론 온겨레의 사기앙양과 독립정신 고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Q. 포도주와 와인에 대해 차이점이 무었일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정확히 말하자면, 와인(wine)은 과실주(果實酒)의 총칭입니다.즉, 과일의 과즙을 모아서 발효시켜 만든 술은 모두 와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포도즙을 발효시킨 포도주이기 때문에 '와인=포도주'로 두 용어를 구분없이 사용하는 것이 보통입니다만사과 과즙을 발효시켜 만든 애플 와인이라던가, 블루베리나 라즈베리 과즙을 발효시켜 만든 블루베리 와인, 라즈베리 와인도 있습니다.머루의 과즙을 발효시켜 만든 머루주도 일종의 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영국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기원전 700년 전쯤에 켈트족이 처음으로 브리튼 섬에 들어오게 되고, 기원전 500년경 전쯤에는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전체를 지배하는 종족이 되었습니다.켈트 족의 일파인 게일 족은 나중에 북쪽의 고지대로 올라가 스코틀랜드 인이 되거나, 아예 바다를 건너가 아일랜드 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일파인 켈트계 브리튼 인들은 중부와 남부에 넓게 퍼져 살다가 서쪽 산간 지방으로 들어가서 웨일스 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이후 로마 인들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브리타니아’를 정복하게 됩니다. 첫 번째 침략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율리우스 시저인데, 그는 기원전 55년에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브리튼 섬에 당도하였고, 그 때는 못 당해내서 후퇴하였지만 그 이듬해, 더 큰 부대를 이끌고 와서 제 2차 침략을 시도한 시저는 결국 켈트족을 굴복시켰습니다.제 3차 침략은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서기 43년에 일어났습니다. 훨씬 더 강해진 로마 군대는 전보다도 손쉽게 켈트 족을 정벌한 다음 브리튼 섬에 군대를 주둔시키게 되고 이로써 브리튼은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됩니다.브리튼 섬을 지배하기 시작한 지 400년이 지나자 로마는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넓은 영토를 모두 다스릴 수 없을 지경에 처한 로마 인들은 짐을 꾸려 브리튼 섬을 빠져나오게 되고, 그러자 눈치를 보고 있던 앵글로색슨 족이 슬금슬금 넘어 오기 시작했습니다. 앵글로색슨 족은 당시 브리튼 섬의 주인 행세를 하던 켈트 족을 산악 지대인 북쪽(스코틀랜드)과 서쪽(웨일스)으로 쫓아내고 가장 넓고 살기 좋은 잉글랜드 평원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빼앗은 널찍한 평원에 눌러앉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그 결과 6세기를 지나면서 잉글랜드 전역에 앵글로색슨 족의 작은 왕국들이 세워지게 되는데, 이로써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로 이뤄진 영국판 삼국 시대가 개막됩니다.
Q. 발해는 어떤 나라였고, 왜 멸망했는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대조영은 고구려 귀족 출신으로 뛰어난 리더십과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어요. 그는 고구려 유민들을 하나로 묶고 저항 운동을 이끌며 당나라와 신라에 맞서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698년, 동모산성에서 진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건국했고, 이후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국명을 발해로 변경했습니다. (713년) 이후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이라는 책봉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국가로 발돋움했습니다.발해의 전성기는 9세기 전반, 선왕 때부터 였습니다. 이 무렵 발해는 당에 유학생을 보내는 등 당의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일부 말갈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까지 진출하면서 고구려의 옛 땅 대부분을 찾게되었어요. 이 시기 발해가 얼마나 번성했던지, 중국에서는 발해를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의미의 '해동성국'이라 불렀다고 합니다.하지만 발해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내분과 자연재해로 점점 쇠퇴하다가 926년 거란의 침략 단 3일만에 멸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