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프랑스에서 쫓겨난 위그노들이 독일 프로이센을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당시 프랑스는 많은 귀족과 지방에서 개신교를믿게 되면서 점차 전통 가톨릭과 개신교 간 종교갈등으로 내란과 동요를 겪게됩니다.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의 대학살도 프랑스전역에서 가톨릭 교도에 의한 3만명에 달하는 '위그노(Huguenots)' 살육극이었는데, 위그노는 당시 개신교를 믿는 평신도들을 경멸적으로 일컫던 말입니다.잠시 위그노파의 수장인 앙리 4세가 왕위를 계승해 1598년 낭트칙령을 공포하면서 개신교도들을 보호하기도 했으나, 결국 절대군주인 루이 14세가 1685년 이를 폐기했고 이후 5년에 걸쳐서 20만~100만명의 위그노가 프랑스를 빠져빠나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신교도였던 위그노는 젊은지식인들이었고, 제철.염료∙화학.정밀 기술 등 당시로선 첨단 기술을 보유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프랑스를 탈출해 전 세계로 흡어지며 프랑스경제가 기울었고, 독일∙네덜란드∙영국.스위스 등위그노들이 간 국가들에선 본격적으로 산업이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특히 독일은 이들에게 많은 특혜를 제공하며 적극 받아들이고, 티센철강과 같은 강력한 철강 산업, 벤츠.BMW 등 자동차 산업의 본산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위그노들에 힘입어 해양 기술을 발전시키며 동방무역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Q. 독일종교중..칼뱅파가 떨어져나간이유가 멀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헤센 가문의 일원인 헤센-카셀과 헤센-다름슈타트는 곧 헤센-마르부르크의 "정확한 양분"과 "상속인의 수에 따른 분할"에 대한 논쟁에 들어갔습니다. 헤센 가문의 가문법에 따르면 영지는 분할 상속 되어야 하므로 상속인의 수에 따른 분할이 타당해 보이지만, 마르부르크를 "동등히 분배"하라는 루트비히 4세의 유언에 의하면 전자 역시 충분히 해석의 여지를 가졌습니다.이로 인해 촉발된 상속 논쟁은 일단은 정확한 양분으로 일단락 되었으나 1605년 헤센-카셀이 칼뱅파로 개종함에 따라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분명 루트비히 4세의 유언에는 "마르부르크 전체의 루터교 지속"이 전제로 깔려있었으므로 헤센-카셀 영주가 칼뱅파 신앙고백을 하게 되면 그가 가진 영지 전역은 칼뱅파로 개종해야 했고, 이는 즉 전제 조건의 위배를 의미했습니다.이제 헤센-다름슈타트는 헤센-마르부르크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할 충분한 명분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그는 1605년 칼뱅파로 개종한 뒤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 원칙에 따라 영지에 폭넓게 칼뱅파를 도입하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마르부르크 대학교를 강제로 칼뱅파로 개종시켜 루터파의 헤센-다름슈타트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Q. 일본에서는 마비키라는 풍습이 있었다는데 그게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에도 시대는 풍요로웠지만, 그 이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신분 제도의 잔혹함이 존재했습니다. 무사와 같은 지배 계층은 상인과 농민들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극심한 굶주림과 세금 부담으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결국 마비키라는 잔혹한 악습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마비키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죽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주로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력이 없는 신생아를 없애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자녀가 3명 이상이거나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주로 시행되었습니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자녀가 3명 이상인 가정이 드물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매년 마비키로 인해 약 4만 명의 아이들이 희생되었습니다.일본인들이 마비키를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신에게 아이를 돌려보내는 행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를 코가의 시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관념 덕분에 일본인들은 죄책감 없이 마비키를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일본 사회는 효를 중시하는 문화였으며, 아이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겼기 때문에 아이의 생사 여부를 부모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