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중세시대에 성직자와 영주 기사, 농노의 역할은 사회 계층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중세 유럽은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 즉 성직자, 기사, 농노의 세신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선 성직자는 제 1신분으로 종교적 권위와 지식을 독점하며 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지주 역할을 하였습니다. 교회는 교육, 기록, 행정 등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성직자는 신의 대리인으로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영주와 기사는 귀족 계층으로 토지와 생산수단을 소유하며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행사합니다. 영주는 자신의 영지에서 농노를 지배하며, 기사들은 군사적 보호와 봉사를 제공합니다.농노는 토지에 매여 농사를 짓고 영주에게 수확물과 세금을 바치며 경제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이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으며, 경제외적 강제를 제한되었습니다. 이들은 봉건제 하에서 상호 의존이며 엄격히 구분된 신분제를 형성, 사회적 안정성과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Q. 십자군전쟁이후 유럽의 국가들은 이슬람으로부터 어떤 문물을 받아들이고 발전하게 되나요?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 수학, 천문학, 의학 등 고전 지식이 아랍어로 보존되어 있다가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라틴어로 번역도어 유럽으로 다시 유입된 것입니다. 이슬람이 수학, 과학, 철학, 의학 지식이 유럽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르네상스의 지적 기반이 되었습니다.그리고 향신료, 설탕, 비단, 커피, 공중 목욕탕 등 생활 문화가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또한 이슬람의 건축 양식과 장식 기법 도 유럽의 고딕 건축과 예술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Q.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싸우는 이유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갈등하는 이유는 본래 이 지역은 주로 아랍계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었고, 유대인은 소수에 불과햇습니다. 그러나 1차 대전 중 영국이 전쟁 수행을 원활을 위해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들에게 각각 독립국 지위 보장을 약속하면서 갈등의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 이주가 급증하면서 아랍인과 유대인 간 출돌이 심해진 것입니다. 1947년 유엔은 이 지역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는 안을 제시했지만 아랍측이 거부하였으며,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주변 아랍국가들과 팔레스타인들이 반발해 밟발했고, 이스라엘이 대부분 땅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 유대인 정착촌 건설, 팔레스타인들의 저항, 예루살램이 소유권 문제 등이 겹치면서 갈등이 계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Q. 임진왜란 당시에 선조는 왜 무능력한 왕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인가요?
선조가 무능력하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수도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신했으며, 오랜 재위 기간 동안 조선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붕당 정치를 제대로 조율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동인과 서인을 이용해 갈등과 혼란을 키웠습니다. 인재를 등용하는 능력은 있었으나 그들은 신뢰하지 않고 시기하거나 견제해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 전후로 왕실 내부의 기강이 무너지고, 왕자 교육에도 실패해 후계 구도와 왕실 내분을 심화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