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국회 의사당 앞에 해태상이 있는 이유가 있을까요?
해태상이 국회에 있는 것은 크게 두가지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해태는 전통적으로 정의와 시비판단의 상징입니다. 전설에 다르면 해태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고, 악한 자를 벌하는 신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부터 궁궐, 관청 등 중요한 건물에 세웠기 때문에 국회의사당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해태는 불을 막는 영물로 믿었기에 화재와 재앙을 막아준다는 의미가 있어 궁궐이나 중요한 건물, 사찰 앞에 많이 세웠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에는 1975년 국회 건립 당시 세워졌으며, 국회의 권위와 정의, 그리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해태상 아래에 백포도주를 묻어 화재를 막고 국회를 영구히 보전하자는 염원을 담았습니다.
Q.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사회에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십자군 전쟁은 1096년부터 대략 200년동안 1272년까지 7차에 걸쳐 있었습니다. 비록 1차 십자군 전쟁을 제외하고 실패하였으나 서유럽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선 교황권이 약화되었으며, 기사 계급이 몰락하면서 왕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시와 동방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며 장원제와 봉건제의 기반이 약화되었습니다. 또한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서유럽은 이슬람 세계의 선진 문물, 과학, 의학, 고전 지식 등을 받아들이면서 문화적, 지적 발전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Q. 척 부인과 유여의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척부인은 한나라 유방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자 아들 유여의 생모입니다. 유방이 황제가 된 뒤에도 척부인은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유방은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를 황태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신하들과 정실부인 여태후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유방 사후 여태후가 실권을 잡자 척부인과 유여의는 참혹한 최후를 맞습니다. 여태후는 척부인을 궁형에 가두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손발을 자른 뒤 눈을 뽑고 귀에 유향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들고 말을 못하게 한 뒤 돼지우리에 가두는 등 극악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유여의는 척부인의 아들로, 유방이 총애해 조(趙)왕에 봉해졌습니다. 그러나 유방 사후, 여태후는 자신의 아들 혜제(유영) 외에 다른 후계자가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여의를 불러들여 독살했습니다. 당시 유여의는 겨우 12세였습니다.
Q.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말이 통했을까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기본적으로 언어의 뿌리가 같아 서로 의사소통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지배층 언어가 거의 같았으며, 백제 하층민의 언어는 신라어와도 유사하여 일상적인 소통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실제로 삼국사기 사료에서 백제인이 고구려에 항복해 곧바로 관직을 맡거나, 백제인인 신라에서 향가를 만들어 부르는 사례가 있습니다.다만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의 언어 차이가 크지는 않지만 서로 다른 사투리 같이 일부에서는 통역 역할이 필요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사투리같이 차이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