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삼국지 여포의 경우 만일 조조군으로 갔다면?
여포가 조조에게 항복했고, 조조가 여포를 위하에 받아들였던 조조의 무력은 분명 대폭강화되었을 것입니다. 천하통일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결정적 변수는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조조는 실제로 여포를 죽일지 살릴지 망설였으나 여포는 주군을 여러번 배신한 인물이라는 점을 가장 크게 염려했습니다. 비록 여포가 무력을 압도적이었지만 정치적 판단력, 지략, 측근 관리 능력이 부족했고, 그 동안 정원, 동탁, 장양, 유표 등 여러 명 주군을 계속 배신해 명분이 매우 약했습니다. 즉, 조조가 여포를 받아들여도, 내부에서 불안 요소로 작용하거나 언젠가 조조 혹은 조조군을 위협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Q. 역사속 공자의 후손은 중국에 있었던 국가들에게 우대를 받았다던데 사실인가요?
공자의 후손들은 실제로 중국의 역대 왕조-한족 왕조뿐만 아니라 이민족 왕조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진시황은 분서갱유로 유학자를 탄압했지만 공자의 9세손인 공부를 노국 문통군에 봉했고, 이후 공족 출신들이 계속 제사를 주관하게 했습니다.그리고 한나라는 공자의 13세에게 벼슬과 봉록을 내리는 등 명예와 혜택을 주었습니다. 이후 한무제의 독존유슬 정책 이후 공자 후손의 지위가 더욱 올라갔습니다.이후에도 공자의 후예를 우대하고, 몽골계 원나라도 충성을 맹세한 공씨 집안 양측에 특권을 보장했습니다. 금나라(여진족), 원나라(몽골족)도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자 직계자손에게 똑같이 ‘연성공’ 작위를 내려 경쟁적으로 우대했습니다. 청나라(만주족) 역시 명나라의 제도를 계승해 공자 후손에 대한 예우와 작위, 봉록, 특권을 보장했습니다
Q. 대한민국이 자력으로 광복할 수 있는 역량은 있었나요?
연합국의 승리없이 자력으로 광복을 이룰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국내외 지속적인 독립 운동이 있었기에 국제 사회도 이를 인정하여 독립에 기초가 된 것입니다. 특히 태펴양 전쟁 말기 중국 관내의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아 국내 정진군을 조직하여 국내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화북의 조선의용군도 국내의 조선건국동맹의 무장 봉기와 더불여 연합하여 국내 진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즉 일제말 독립군의 군사 작전을 준비한 것도 사실입니다. 무장 투쟁 이외에도 외교 투쟁, 의열투쟁 등 다양한 민족 운동을 통해 국제 사회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렸으며, 이를 열강들이 인식하고 있었기에 독립을 약속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과 연합국의 승리가 결합되어 독립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Q. 이란혁명수비대의 유래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이란의 혁명 수비대는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창설된 군대입니다. 혁명 이후 기존 정규군의 쿠데타 가능성과 외국 세력의 내정 간섭을 차단하고, 새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별도의 친위 군대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혁명수비대는 정규군과 다르게 정치, 이념적으로 이슬람 혁명을 지키고 국가 이슬람 체계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혁명수비대는 정규군과는 별개의 독립적 조직으로 강력한 무장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며, 이란 내에서 ‘정부 위의 정부’라는 평가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