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대마도의 역사에 대해 알고싶어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마도는 어떤 땅이었을까?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인 숙종 45년(1719), 신유한(申維翰)은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기록을 담당하는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와 ‘해유록(海遊錄)’을 남겼다.“대마주(對馬州)의 별명은 방진(芳津)이라고도 한다. 토지는 척박해서 채 백물(百物·백 가지 産物)도 생산되지 않는다. 산에는 밭이 없고 들에는 도랑이 없고, 터 안에는 채전(菜田·채소밭)이 없다. 오로지 고기를 잡고 해초를 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대마도인들은 서쪽으로는 (조선의) 초량(草梁·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모이고, 북으로는 일본의 오사카(大阪)와 당시 왜국의 수도인 나라(奈良)에 통한다. 동으로는 나가사키(長崎)에서 장사하니, 바다 가운데의 한 도회(都會)와 같다.” 세종 24년(1442), 신숙주(1417∼1475)는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 대마도에서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성종 2년(1471),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했다.“군(郡)은 8개이고 사람은 모두 바닷가 포구에서 살고 있다. 대마도의 포구는 82개나 된다. 남북은 3일이면 다 돌아볼 수 있고 동서 횡단은 하루나 반나절이면 족하다. 바다와 접한 사면은 모두 돌산이고 땅은 척박하다. 백성은 가난해서 소금을 굽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해산물을 잡아 팔아서 살고 있다. 종(宗)씨가 대대로 도주(島主)가 되는데…” 이현종(李鉉淙)이 편찬한 ‘조선 전기 대일교섭사’(1964년 한국연구원 간행)에 따르면 대마도의 유력자 중에는 조선의 관직을 받은 ‘수직왜인(受職倭人)’과 특별히 세견선이나 세사미를 배당받는 자들이 있었다. 이키시마(壹岐島)에 있는 수직왜인은 3명인데, 대마도의 수직왜인은 17명이나 된다. 대마도인들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받은 교지(敎旨)를 대개 ‘고신(告身)’이라고 한다. 대마도에서는 오자키의 소다(早田) 집안, 지다류(志多留)의 다게다(武田) 집안, 이나(伊奈)의 쇼야(小野) 집안에서 이러한 고신이 전해 오고 있다.고신을 받은 대마도인들은 1년에 한 번 조선에 도래하여, 관직에 상당한 예우를 받고 특별한 이득을 얻어갔다. 조선 초기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세약선(歲約船)·수직인선(受職人船)·수국서인선(受國書人船)의 수가 204척이었는데, 그 중에서 대마도 배는 절반에 육박하는 124척이었다.
Q. 고려 시대에 몽골군들이 끊임없이 침략을 해왔었는데 처음 이들이 전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가 최씨의 무단정치(武斷政治) 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 등장하여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희종 2년)에는 칭기즈 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帝國)으로 군림하였다.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의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다음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니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고종 4년)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
Q. 오래 전부터 중국의 역사를 볼때 헷갈리는게 있습니다. 흉노족과 선비족은 다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후한 멸망 후 삼국시대를 거쳐 280년 진(晉)이 중국을 통일했으나 ‘팔왕(八王)의 난’으로 혼란을 겪는 가운데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선비·갈·저·강 5개 민족이 남하하여 화북지방에 각기 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오호십육국 시대’(304~439)로, 북방의 이민족인 오호(五胡)와 한족이 세운 16개 나라가 135년 동안 흥망을 거듭했다.북방민족 오호(五胡)는 다음과 같이 중국북방지역에서 활약했다.①흉노 분열 후 내몽골지역에 있던 남흉노는 북쪽 선비세력의 압력으로 황허강의 오르도스지역으로 남하하였다가 만리장성 내 중국영역에 자리 잡았다. 남흉노의 직계 후손인 유연(劉淵)은 외척이 한나라 출신이어서 한나라 후예라는 명분으로 오호족 최초 정권인 한(漢․前趙)을 건국했다(304년).유연의 아들 유총(劉聰)은 ‘중국의 아틸라’로 불리는데, 진나라 낙양을 점령하고 장안으로 쳐들어가 인구의 절반을 학살한 인물이다. 당시 북중국을 장악한 흉노세력을 피해서 양자강 이남으로 피난 간 중국왕조가 동진이다.②전조의 유총 사후 흉노의 다른 계통으로 갈족인 석륵이 후조(後趙)를 세우고 전조를 멸망시켰으나 불과 20년 만에 선비족 모용씨에게 정복당했다(352년).③선비족 탁발씨 부족은 내몽골 호화호특을 근거로 하다 만리장성 아래로 남하해 산서북부에 자리 잡고 시조 역미의 손자 의여가 대국(代國)을 세웠다(310년).선비족 모용씨 부족은 현재의 요녕성 창려를 근거로 만주남부 요동과 요서지역을 장악하고 모용 황이 연국(燕國:전연, 후연, 서연, 남연)의 기초를 다졌다(337~438년).④티베트계 저족은 감숙남부와 사천북부 산지에 근거하다가 부홍이 장안을 수도로 섬서지역에 전진을 건국했다. 그 후 국가기반을 확고히 한 부견이 모용의 지배지역을 모두 제압하고 북중국을 장악했으나 후대에 모용씨에 다시 자리를 내주었다(350~394년).⑤또 다른 티베트계 강족의 요장은 감숙성을 본거지로 하다가 부견 사후 모용씨가 장악했다가 떠난 장안을 점거하여 후진을 세웠다(386~417년).이처럼 왕국의 난립이 지속되던 대 혼란기는 선비족 탁발부에 의해 다시 통일됐다. 탁발부의 역사는 역미에서 출발해 손자 의여가 대국(代國)을 세웠고, 5대손 십익건이 부족통합과 국가정비를 이루었는데, 십익건의 손자가 태조 도무제 탁발규다. 386년 즉위한 탁발규는 모용의 후연을 정복하고 위(북위)를 건국하였다
Q. 순장제도는 어디서 시작된 제도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시대 왕과 귀족 등 권력자가 사망하여 무덤에 매장될 때 그에 종속되어 있던 사람을 함께 죽여 매장하는 장례 풍습.순장의 출현과 사회적 의미순장은 왕과 귀족 등 권력자가 사망하여 무덤에 매장될 때 그에 종속되어 있던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장례 풍습으로, 죽음 후의 내세(來世)를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었던 권력자의 존재와 신분제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세계사적으로 고대 중국, 인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로마 등 동서양의 선진 문명권을 비롯하여 아메리카 대륙, 남태평양의 섬 등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며, 특히 권력이 집중되거나 국가가 발생하는 단계에 출현하였다.순장이 고대 사회에서 시행되기 위해서는 차별적 신분 구조와 지배체제가 갖춰져야 하며, 내세관에 의한 묘장제도(墓葬制度)가 확립되고, 강제로 사람을 죽여 장례를 치르는 데 대한 사회적 용인이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순장은 비로소 장례 풍습으로 제도화될 수 있었다.순장 제도의 여부는 고대 사회의 발전 단계를 설명할 때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며, 순장이 존재한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덜 발달되거나 미성숙한 사회로 인식되기도 한다.고대 한반도의 경우, 신라와 가야는 순장이 널리 성행한 데 비해 고구려, 백제는 순장이 시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중원과의 빈번한 문물교류를 통해 순장이 좋지 못한 장례 행위임을 인식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