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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을 공유하고 모르는 것을 함께 공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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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전문가
맑은글터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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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씨받이와 씨내리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씨받이는 여성으로 아내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자녀를 가질 수 없는 경우 다른 여성의 배를 빌려 자녀를 가졌던 방식으로 지금의 대리모와 같습니다. 씨내리는 남성으로 남편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자녀를 가질 수 없는 경우 다른 남성의 씨를 받아 자녀를 가졌던 방식으로 지금의 정자기증과 비슷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씨받이 씨내리와 지금의 대리모, 정자 기증의 차이점은 과거의 경우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방식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대상과 성관계를 하여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씨받이와 씨내리는 조선시대에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유교적인 사회에서 드러내놓고 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정말 있었다 해도 몰래 하지 않았나 판단됩니다. 실록 같은 기록에서도 씨받이 씨내리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아들이 대를 이어야 한다는 유교적인 전통에 대한 가십으로 아들을 낳기 위에 그렇게 까지 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보통 종손이 아들을 가지지 못했을 경우에는 배를 빌려 낳기 보다는 종손이 아닌 형제 중 아들이 있는 경우 그 아이를 호적 상 양자로 들이는 방식을 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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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일본은 조총을 언제부터 사용하게되엇는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총은 전장식 화승총으로 16~19세기 동안 사용되었으며, 16세기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중국-한국의 순서로 도입되었으며 조총이라는 이름은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 하여 새 조(鳥)자를 써서 명나라 때 지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타네가시마(種子島)' 또는 '텟포(鉄砲, 철포)'라고 불렸으나 일본의 사신이 조선 중기 1591년에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소개할 때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자어인 명의 이름인 조총으로 소개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은 센고쿠시대(전국시대)로 혼란기였는데 이 때 조총이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전해지기는 했지만 그 배후에는 유럽의 가톨릭 세력이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신대륙으로 교류를 넓히던 포르투갈 상인을 태운 배가 명나라로 가던 중 풍랑에 의해 규슈 남단의 다네가시마에 도착하게 되었고 영주인 다네가시마 토키타카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조총의 위력에 놀라 도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럽에서 종교개혁 이후 가톡릭의 위세가 약화되던 터라 이내 신대륙으로 포교활동을 넓혀갔고 포르투갈 상인이 들어간 이후 1549년 예수회 선교사가 파견되었습니다. 이후 다이묘 중에서도 신자들이 많이 나왔고 교황은 4명의 소년사절을 1582년에 로마로 보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도입이 시작된 기독교는 막강한 세력인 오다 노부나가를 지원하였고, 오다 노부나가는 기독교를 보호했고 신자가 급격히 늘어나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 세력은 전국시대 전쟁 시 조총 부대를 가장 효율적으로 써서 결국 경쟁 세력들을 제압했으며, 그의 수하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일본의 통일시대를 이끌게 됩니다. 하지만 천황이 있는 봉건사회였던 일본에 침투한 기독교는 인간성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 지배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종교였기에 자신들을 지지했던 오다 노부나가의 수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강력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이 문화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자신들이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있는 신의 나라 일본 천황과 다이묘(영주) 체제인 일본의 전통을 부정하게 되므로 기독교 포교 금지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선봉장으로 임진왜란을 진행했던 고니시 유키나가 등 크리스찬 다이묘들이 일본 통일을 방해할까 염려도 있었고, 나가사키의 사원을 기독교도들이 불태우는 사건 등 계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개신교와 가톨릭의 포교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세력이 처음에는 일본의 봉건제도를 확실하게 무너뜨리고 남미처럼 기독교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문화과 기술을 지원해주었으나, 일본은 그들의 발전된 문명과 기술 만을 뽑아 먹고 자신들만의 실리를 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한 군사력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중국 명나라까지 삼킬 군국주의적 계획을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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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새해복많이받으세요 는 언제부터 새해인사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는 해가 바뀌는 시기의 인사말입니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추정하자면 달력이 만들어지고 그 달력으로 1년을 계산할 수 있게 된 이후부터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대한민국, 중국의 경우 복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건강, 하는 일에 대해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일반적인 인사를 하기도 합니다. 이웃나라이지만 일본의 경우 복이라는 단어보다는 새해가 밝은 것에 대해 축하를 전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영어권의 경우 Happy new year 처럼 새해에 행복을 기원하는 말을 전합니다. 이 모든 것이 1년을 계산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생겨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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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중국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국력이 촉나라 국력이랑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였을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 전성기 시절의 국력은 중국의 삼국시대 위, 촉, 오와는 비교도 안될 점도로 강대국입니다. 이후 최강국이라고 하던 당나라도 단독으로는 고구려에 패하고 돌아갔습니다. 고구려에 내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멸망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초기에는 중국의 한, 후연 등에 전력적으로 밀렸으나 주변국의 정복하며 영토를 넓혀갔고, 광개토태왕, 장수왕 등 전성기 시절 고구려는 황제국가로서 백제, 신라, 일본, 돌궐, 말갈 등을 영향력 하에 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대국가의 국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고구려 열망 이후 고구려보다 더 넓은 영토를 가졌던 대진국 발해라던가, 신라를 멸하고 다시 삼국을 통일한 고려 둘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정통성을 내세울 정도로 강력한 고대국가였음은 추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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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 창작을 공부하려고 하는데 볼만한 서적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 읽기 편한 잭을 살펴보시고 선택하시면 됩니다. 고전 시집으로 서정적인 것은 예이츠, 윤동주를, 현대시는 보들레르 , 기형도 등을 참고로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그리고 우선 많이 써보시고 퇴고하시고를 반복하다보면 자신만의 향기가 생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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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 역사의 최초의 여왕은 신라 선덕여왕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여왕은 신라의 선덕, 진덕, 진성여왕 3명이 다 입니다.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던 이유는 신라에만 있었던 특이한 신분제도에 있습니다. 골품제도인데 그로 인해 아들이 없었던 이유로 다른 이가 왕을 할 수 없었기에 여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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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려가 멸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중후기부터 왕권이 약화되고 신흥무인세력이 대두되었습니다. 여러가지 병폐가 많아지고 불교도 타락하여 정교가 결탁되는 등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후 신진사대부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국가를 소망했고, 이들 중 정도전이 나서서 계획하게 됩니다. 이에 문신들만을 가지고 하기 어려우니 명망이 높은 무인 중 동부가문의 수장이고 국경을 지키고 있던 이성계를 포섭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최영을 위시로 한 기득권 무인계급을 통해 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추진하였고 이성계는 반대하였으나 결국은 명과의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왕과 최영의 명령으로 출정하였으나 위화도에서 자연재해 및 풍토병으로 진격을 미루던 중 함께 했던 수하 및 가문의 사람들과 조민수와 합세하여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고 역성 혁명을 하게 되었고, 결국에 고려를 내리고 조선이 건국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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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전국을 통일했다는데 그전에는 통일국가가 아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은 그 전에도 천황을 중심으로 한 통일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천황의 권위가 극도로 약해지고, 무로마치 막부 시대 중후기에 들어서 오닌의 난으로 쇼군이 수장인 막부의 권위까지 바닥으로 치닫자 다이묘라고 불리우는 각 지역 영주들과 사무라이들이 저마다 자신이 최고가 되겠다며 가문의 이름으로 싸우는 전국적으로 혼란한 시기가 도래하였습니다 이것을 전국시대라고 하고 일본어로 센고쿠 시대라고 합니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 중심의 오다 가문,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심의 도쿠가와 가문, 타케다 신겐이 이끈 기마전투에 능한 타게다 가문이 가장 이름있는 가문이었습니다.일본 전국시대의 통일은 오다 가문을 통해서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타케다 신겐이 이끄는 타게다 가문을 정복하였고, 그에 뒤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전투에서 호죠 가문을 물리치면서 사실상 전국시대의 끝이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간의 패권 다툼이 암암리에 있었기에 전국시대라기 보다는 암투의 시대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입지는 그렇게 독보적이지 않았습니다. 평민 출신 등의 기반이 약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강력한 위협세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언제든지 도전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자신들의 내치를 다지기 위해 선택한 것이 조선을 침공하는 임진왜란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것을 통해 조선을 거쳐 중국에까지 진격한다는 생각으로 전 병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고, 일본 내부가 전쟁으로 하나가 되고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지기를 원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최종적으로 일본의 패배로 마무리 되었고, 전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여 도요토미 정권이 몰락하고 에도 막부가 수립됩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화친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고, 반대편을 모두 숙청, 멸문지화시킵니다. 이후 오사카 겨울/여름 성전을 통해 완전한 일본 통일을 이루어냅니다. 그런데 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단한 것은 이전 막부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책들을 잘 이어받고 발전시켜 국내를 안정시키고 일본을 오랫동안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하는 꼴과는 사뭇 다르니 이 부분은 일본에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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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노가다 라는 말은 순수 우리말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가다는 몸을 쓰는 막일을 지칭하는 명사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말은 원래 일본어인 ど-かた(dokata[土方])에서 발음 변형되어 굳어진 것입니다. 국어 사전적 뜻으로는 '행동과 성질이 거칠고 불량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 '막일, 막일꾼' 을 뜻합니다. 보통 일상에서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반복되는 힘들고 고된 일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보시면 됩니다. 이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일본어에서 변형된 것이니 일제 강점기부터 사용하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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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예수의 탄생일은 기록이 없는데, 왜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기리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이라며 기리고 축제로서 즐기고 있습니다. 고대부터 이 날짜는 로마인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날이었는데 로마력(달력)에서 1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동지였고,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일이었습니다. 미트라는 274년에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국가 수호신으로 지정되었는데 그해 12월 25일에 미트라를 섬기는 신전을 세우고 이날을 태양절로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태양신 미트라를 국가의 수호신으로 섬기는 일은 로마 황제들의 전통이 되었다고 합니다.​이후 기독교가 확산되고 이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역시 이 날을 ‘존경스러운 태양의 날’이라고 선포하였는데 이 역시 태양 숭배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로마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을 축하하는 동지제(冬至祭)를 브루말리아(Brumalia)라 불렀고 이것이 12월 25일이었습니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로마의 국교가 된 로마교회가 종교적 숙적인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교인 미트라교를 견제하면서 그들의 축제일을 이용해 로마인들을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안을 강구하였습니다. 이러던 중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묘사하고 있으니 고대부터 로마인들이 섬기던 빛의 신인 ‘미트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 시 하는 전략을 가지고 갔습니다. 즉 로마교회는 바로 12월 25일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동일하게 만들어 축하하는 전략이었습니다. 그것이 주효하였고, 많은 로마인들을 기독교로 포섭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제265대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그의 저서 『나사렛 예수의 유년기』에서 크리스마스 날짜에 오류가 있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청에서도 “크리스마스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성경에 기반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날은 아니지만, 고대 로마 교회의 성장의 한 기점이 되었다는 것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지금은 전 세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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