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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을 공유하고 모르는 것을 함께 공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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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전문가
맑은글터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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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성경에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성경은 구약이라고 불리는 부분과 신약이라고 불리는 부분의 통합본입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일부는 아랍어로 쓰여져있습니다.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여졌습니다.구약은 성경의 첫 번째 부분으로 약 39년에 걸쳐 기록된 1,000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유대 민족의 역사 뿐만 아니라 유대의 율법, 시, 예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성이 율법서, 역사서, 시서, 선지자서의 네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신약은 성경의 두 번째 부분으로, 약 27년에 걸쳐 기록된 50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초기 기독교 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는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성은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행전(기독교 교회의 역사), 서신서(교의, 윤리, 기독교 생활), 요한계시록의 네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구약에서는 기독교 율법과 역사 등을 서술하며, 이후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예언을 제시하고, 신약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 본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 기독교 교회의 설립, 구약 예언의 성취에 대한 기록이 쓰여져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이어지는 기독교 역사를 보여준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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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현악기 종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찰현악기 : 아쟁, 해금 (바이올린 등과 같이 마찰 방식)* 발현악기 : 거문고, 가야금(산조가야금, 정악가야금),금, 슬, 향비파, 당비파, 대쟁, 월금, 공후 (기타와 같이 현을 튕기는 방식)* 타현악기 : 양금 (실로폰처럼 현을 두드려서 내는 방식)입니다. 순수 우리의 악기도 있고, 비파와 같은 악기는 중국과 교류 발전해오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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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발해는 어떻게 세워졌고 어떻게 멸망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고구려 유민들과 고구려와 함께 하던 주변 부족국가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고구려가 멸망하였으나 그 유민들과 세력들은 인정하지 않고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신라도 백제, 고구려가 망하였으나, 그 지역을 당의 세력이 들어와 있었기에 오롯히 통일했다고 할 수 없던 상황입니다. 이에 고구려, 백제 부흥세력들과 힘을 연합하여 당에 저항하였고, 결국에 신라와 당의 전쟁에서 신라는 당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하였다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가 가지고 있던 영토의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을 뿐 나머지는 고구려 장수였던 대중상, 대조영, 걸사비우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등을 규합하여 국호를 진이라고 하고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가게 됩니다. 발해의 초기 정식 명칭은 진입니다. 그래서 큰 진 나라다 하여 대진국이라고 불리었습니다. 대진국의 영토가 커지고 힘이 강성해지자 당시 중원의 패자였던 당나라가 자신들은 황제국가로 진국을 제후국인 것처럼 인정하여 대중상은 진국공, 걸사비우를 허국공이라 봉한다는 칙서를 내렸고, 걸사비우가 이를 거부하였고, 당과 대치하다가 사망하였고, 대중상도 얼마 후 사망하고, 대조영이 황위에 오르자 당에서는 그것을 또 격하하여 발해군왕에 봉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사서를 기준으로 발해라는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그 전에는 일본 등 주변국에서는 여전히 고려라고 불리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진국 발해는 황제국으로 전승한 고구려 이상으로 맹위를 떨친 강국으로 해동성국이라 불리었습니다. 문왕 이후에는 외교적으로 발해라는 국호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대진국 발해는 고구려계와 말갈계를 대표적으로 하여 다민족 국가로서 고구려계였던 대중상, 대조영, 말갈계의 걸사비우를 주축으로 하여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서 딱 30년 후인 698년에 건국되었고, 926년에 거란의 침공과 내분으로 인해 멸망하였다고 합니다. 멸망의 시점은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발해 멸망 후 바로 그 유민들이 후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판단되어집니다. 그 이유는 책부원귀, 오대회요, 구오대사, 오대사기, 속자치통감 등의 중국 사서에 발해 멸망 3년 뒤인 929년 5월 발해에서 고정사라는 사신을 파견하는 기록도 나오고, 929년 7월 19일 그 고정사를 태자 세마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에 934년 발해 태자 대광현이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귀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이후 기록에는 발해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고, 같은 대씨 성의 왕과 태자에 대한 기록에서 정안국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발해라는 국호가 정안국으로 내부적인 이유에 의해 바뀌지 않았나 판단됩니다. 200년 이상 지속된 강국이었습니다. 991년 기록에서도 왕자인 대원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도 왕권을 발해 왕족인 대씨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어쨌든 발해의 멸망의 결정적인 계기는 926년 거란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 시기에 백두산의 화산폭발이 있었던 시기이므로, 전쟁 패배에 이어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화산 폭발이었던 자연재해가 있었기에 더 이상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통일 신라는 결국에 고구려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태봉국을 거쳐, 왕건을 통해 또다시 통일되어 고구려라는 이름을 계승하여 고려(고리라고도 함)를 건국하였으니 그 명맥이 계속 이어져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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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리랑이라는 민요는 무슨 뜻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리랑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뜻에 대한 설이 있습니다. 단순히 고개나 힘든 일을 극복하는 의태어 같은 것이라는 설, 아무런 뜻이 없는 노래 속 추임새 같은 것이라는 설, 고대의 특정 지역명이라는 설입니다. 조금 구체적인 설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이 설은 구체적으로 그 뜻을 한자어로 제시하였습니다. 아리랑은 한자로 나 아(我), 다스릴(이치) 리(理), 밝을(깨달을) 랑(朗)의 아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부터 내려오는 스스로 배우고 깨닫는 수신(修身)의 문화에 그 뿌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갈고 닦아서 나를 알고 다스리는 이치를 깨달아서 자신의 본성을 밝혀내고 삶에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죠. 밀양 아리랑의 가사로 그 뜻을 접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나 자신에 대해 들여다 보아라)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추운 계절 꽃이 신기하듯 얼음 속에 갇혀 있는 내 자신을 들여다 보아라)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나를 깨닫게 되면 기쁘지 않겠나)아라리가 났네 (나를 깨닫는 이치를 알게 되었네)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내 자신을 깨우칠 수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오)조금은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럴 듯해 보입니다. 다음 설은 어원을 살펴보는 것으로 고대 우리의 말과 우리와 비슷한 말을 쓰는 인도의 타밀어 등 그 고대어를 유추해보는 방식입니다.가야 김수로왕의 아내인 허황후는 인도에서 타밀어를 쓰는 부족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아리람신과 쓰리람신이 있다고 합니다.(벌써 말이 비슷하죠^^) 인도 타밀 민요에도 '아라로 아리라로'라는 비슷한 추임 후렴이 있다고 합니다.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인도의 타밀어는 한국어와 유사하거나 같은 단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아리랑의 어원이 고대 가야의 언어이던가 인도의 타밀어이던가 할 수 있다는 설입니다. 인도 지역에서 아리는 아름답다, 마음이 아프다의 뜻을 가진다고 합니다. 스리는 풍요롭다, 빛나다, 또 마찬가지로 마음이 아프다의 뜻도 있다고 합니다. 랑은 어떠한 특정 장소를 뜻한다고 합니다. 스리랑카의 경우 빛나고 풍요로운 땅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애매한 것은 어떤 때에는 아리가 아픈 뜻이고, 어떤 때에는 아름다운의 뜻인지 그 구분이 모호하긴 합니다. 우리 수돗물을 한강의 옛 명칭인 아리수에서 가져왔는데 그것은 아름다운 강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리랑 노래가사에서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에서는 또 아픈 마음을 뜻하는 것 같고 여기서 '아리랑 고개'는 이별을 하는 분기점이 되는 특정 지역을 뜻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노래에 따라 아리랑이 아름다운 곳이고 하고, 이별을 하는 가슴 아픈 곳이기도 한가 봅니다. 마지막으로 아리를 아름답다의 뜻으로, 랑을 사람, 님이라는 설입니다. 아리수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현재 아리는 아름답다는 뜻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정착된 듯 합니다. 하지만 아리도 우리가 상처가 나서 아플 때 아린다 라는 말을 쓰기도 하니 가슴 아플 정도로 아름답다라는 뜻이라고 의역해봅니다. 스리는 아프다는 뜻이라고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손이 쓰린다 등의 통증을 나타내는 말을 쓰니, 스리랑도 가슴 쓰리도록 아프다는 뜻이라고 의역해봅니다. 그렇다면 '아리랑, 스리랑'은 가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 가슴 쓰리도록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해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겠죠. 우리가 보통 전쟁이 난 것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을 '난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라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발생한 심적인 혼란상태를 말하고 "아라리가 났네"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던 가 더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던가 해서 아프고 복잡해진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고대 부족사회에서 '고개'라고 하는 주변보다 융기된 지형은 마을을 구분하는 장소적 경계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오"라는 것을 분석해보면 사랑하는 님이 떠나간 곳으로 나도 함께 따라가고 싶다라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두가 다 좋은 뜻이지만, 여러가지 중복되는 것으로 볼 때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으로 말씀드린 것이 더 가슴에 와닿기는 합니다.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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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무덤에 세우는 비석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덤에는 묻힌 인물의 이름, 자, 호와 같은 별칭, 탄생부터 사망까지 기간, 가족 관계, 생전에 고인이 비석에 새기고자 했던 명언 등이 기록되곤 합니다. 무덤에 비석을 세우거나 이러한 내용들을 명기하는 이유는 무덤에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그의 자손은 누구인지, 무덤의 위치 등을 명확히 하고, 그의 업적, 행적, 삶을 기리기 위해서 입니다. 중국과 한국의 묘비의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중국 : 고대에는 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한 희생물을 매어두는 용도로 비석을 설치. 해그림자를 표시하여 시각을 알리는 용도로 비석을 활용하였고 후에 이 비석에 무덤 속 인물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새기면서 묘갈을 세우는 풍습이 점차 확대한국 : 고려시대 최충이라는 사람의 '홍경사갈(弘慶寺碣)'을 시작으로 본다. 15세기 후반에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여 성리학이 크게 보급되자 묘역을 치장하고 묘비를 세우는 것이 일반화여기서 말하는 묘갈은 가장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에 세우는 묘비를 뜻합니다. 후대에 와서는 용, 거북이 등으로 머릿돌을 올리곤 하여 형태는 묘갈이나 간단한 신원, 연대, 자손만 기입하는 묘표의 형태를 묘비라고 하고, 용, 거북이 등으로 머릿돌을 올려 꾸며놓은 것은 묘갈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추가로 신도비라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2품 이상의 관직을 한 사람의 경우 추가로 묘의 동남쪽 위치에 세웠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 모든 종류의 것을 통칭해서 묘비라고 하면 무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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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왜 연개소문은 후계자를 제대로 기르지 못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왜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나 라고 하는 것보다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연개소문은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의 3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위대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도 그러한 권력에의 욕심이 많이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주변 신하들의 그 욕심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간질로 서로 싸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1차 고구려와 당의 전쟁 시 연개소문이 총 지휘하여 어렵게 이세민이 직접 출정한 당을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2차 고구려와 당의 전쟁 시에는 연개소문인 장자인 연남생에게 군사를 내어주고 총 지휘하여 압록강을 넘지 못하게 막으라고 하였으나 전투 지휘 경험이 적었던 연남생은 압록강을 내어주고 당군이 평양성까지 밀고 내려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직접 참전하고 장기전으로 이끌어가면서 당의 보급을 끊어버리는 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신라 역시 백제의 잔존 세력이 있어 쉬이 군사를 고구려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연개소문은 총공세를 시작하였고, 보급이 끊어져 힘들어하던 당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서 2차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도 고구려가 승리하였습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이후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연개소문이 있는 한 고구려와 절대 대적하지 말라고 하였고, 이에 당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최대 종교행사인 태산봉선에 고구려와 신라, 일본까지 초청하여 우호관계를 가지고 갑니다. 그러던 중 그간 전쟁의 상처와 노환으로 인해 연개소문이 사망합니다. 유언으로 연개소문은 삼형제에게 절대 싸우지 말고 잘 도와가며 국정을 운영하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연개소문 사후에 그가 맡고 있던 대막리지 벼슬을 장자인 연남생이 이어받았고 연남건, 연남삼에게도 고위 관직을 이어받았습니다. 절대 권력자이던 연개소문이 죽자 주변의 호족들은 아들들에게 줄을 대어 권력을 이어나가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연씨 가문이 계속 권력을 이어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신하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연남생이 지방 순방을 하던 중 두 동생들을 죽일 것이라는 이간질을 하여 연남건, 연남산이 형인 연남생을 공격하여 평양성을 장악하고 관직을 빼앗아 버립니다. 이에 연남생은 고구려를 버리고 당에 망명해버립니다. 이에 666년 당이 다시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되었고,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의 정보와 공략방법을 연구한 당이 평양성을 손쉽게 얻게 됩니다. 연남생은 자신이 관리하던 성을 당에 바쳤고, 당은 그 곳을 거점으로 하여 추운 겨울 보급 걱정없이 주둔하여 평양성을 공략했던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와 1:1로 붙어서 이길 수 있는 주변 국가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내부적으로 먼저 무너졌고 그 틈을 타 당과 신라가 3차 공격을 하여 결국 고구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역사는 다시 대중상과 대조영에 의해 대진국 발해로 더욱 융성한 국가로 발전하였으니 그 명맥이 끊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후 고려도 고구려를 계승하는 나라라는 뜻으로 국호를 정하였으니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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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무신정권이란 어떤 것을 얘기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신정권이라 함은 당신 군부 세력이 힘이 강해 왕권을 위협하였고, 문신들이 왕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고, 무신들은 국방에 전념하던 때와는 달리 군부에서 정사를 좌지우지 하였던 시기입니다. 고려시대 1,170년 문관과 무관의 차별이 심한 것에 대해 반발했던 군부 수장인 정중부의 난을 시작으로 하여 100년 간 이어졌습니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을 거친 초기 군부집권 혼란기를 지나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무신정권 안정기에 들어섰습니다. 최충헌 집권 이후 60년간 그이 아들 손자, 증손자가 집권하였습니다. 증손자였던 최의가 김준에 의해 살해되면서 최씨 정권은 막을 내리고, 임연, 임유무를 거쳐 1,270년 무신정권이 붕괴되었습니다. 초기의 목적은 문관과 무관의 차별을 타파하기 위함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권력을 가지게 되고 왕권을 쥐락펴락 할 정도로 국기를 문란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무신들이 전국에서 착취와 수탈을 하면서 농민과 천민들의 난이 많이 일어났었던 시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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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어떤으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경국전은 1394년 3월에 저술을 완료하고 같은 해 5월에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에게 지어 바친 사찬 법전입니다. 주나라 제도인 『주례(周禮)』의 6전 체제를 바탕으로 조선의 현실에 맞게 조정하였다 합니다. 6전 앞에는 치국(治國)의 대략의 요지로서 정보위(正寶位)·국호(國號)·정국본(定國本)·세계(世系)·교서(敎書)를 서론으로 실었습니다.서론에서는 천지자연의 이치에 따라 인(仁)으로써 왕위를 지켜 나갈 것,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것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계승이라는 것, 왕위 계승은 장자(長者)나 현자(賢者)로 해야 한다는 것, 교서는 문신의 힘을 빌려 높은 수준으로 제작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 제시되어있습니다.본론으로 치전(治典: 吏典)·부전(賦典: 戶典)·예전(禮典)·정전(政典: 兵典)·헌전(憲典: 刑典)·공전(工典) 등 6전으로 되어 있고 각 전은 총서에 이어 주요 소관업무를 소목으로 나누어 서술되어있습니다.치전에서는 군신(君臣)의 직능과 관리 선발방법을 항목별로 제시하였고, 특히 재상(宰相)이 통치의 실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관리 선발이 고시제도에 의거해 능력 본위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어있습니다.부전에서는 국가의 수입과 지출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 하고,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해 군현제도와 호적제도를 정비하고, 농상(農桑)을 장려할 것, 국가 수입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 국민의 토지 소유를 균등하게 할 것, 병작반수(竝作半收)를 금할 것, 부세(賦稅)를 가벼이 할 것이 강조되어있습니다.국가의 지출 항목으로는 상공(上供: 왕실 경비)·국용(國用: 공공행사비)·군자(軍資)·의창(義倉)·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을 들었고 가능한 지출을 제한하여 국가의 예비경비를 많이 비축해야한다는 원칙이 들어있습니다.예전에서는 조회·제사·교육·외교, 기타 관혼상제 등에 관한 의례의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예는 질서로 정의되고, 그 질서는 상하 차등을 전제로 하되 상하가 서로 협력하는 조화관계가 강조되어있습니다. 교육과 관련해 서민 이상 신분의 교육 참여 기회를 넓히고, 고시제도를 강화해 능력 본위로 인재를 뽑아야 한다 서술되어있습니다.한편, 언로를 개방해 상하의 통정(通情)을 원만하게 할 것과 사대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관혼상제의 의례는 종전의 토속적이며 불교적인 의례를 버리고, 유교적 의례로 대치할 것을 강조하였고. 특히 물질적 낭비의 폐단을 경계하였습니다. 이것은 고려의 불교를 배척하고 신진사대부들이 숭상하는 성리학적 국가통치를 위한 내용입니다. 정전은 병전에 해당하는데 정전이라 한 것은 병제가 사람을 바르게 하는 도덕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입장에 근거를 두고 있어 병제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병농 일치,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 체제, 무기 개량과 훈련 개선, 둔전(屯田)의 중요성 등이 서술되어있습니다. 병제를 운영하는 원칙으로서 백성과 군사를 아끼고 나라를 바르게 인도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전제되어있습니다.헌전에서는 형벌 원칙을 서술하였습니다. 형벌은 어디까지나 정치의 보조수단이지 정치의 근본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형벌과 법은 도덕정치를 구현하는 예방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공전에서는 국가의 각종 물품 제조나 토목공사 등을 운영, 집행하는 원칙을 다루고 있는데, 사치를 금지하고 재정 낭비를 경계할 것, 백성을 지나치게 부려 피로하게 하지 말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이 법전은 정도전 개인이 저술했지만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을 정리, 제시한 것으로 태조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 건국 당시 약속했던 것과 같이 성리학적 기반으로 세운 나라, 사대부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나라를 잊지 말라는 일종의 지침서이자 협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잘 지어진 학문적 바탕이 있기에, 뒤에 『경제육전(經濟六典)』·『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을 거쳐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이 편찬되는 모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경국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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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류 최초의 직업은 어떤 직업이 였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류 최초의 직업을 단정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인류도 영장류나 다른 동물의 무리처럼 무리 생활을 하였으며, 그 무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아 생활해왔을 것입니다. 대신 질문하신 분의 말씀처럼 근로에 대한 가치를 보상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냥꾼, 어부이지 않을까 합니다. 수렵이 채집, 경작보다는 우선 행해진 것이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도 당장에 누구에게 보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냥하여 잡아온 동물이나 수산물에 대해 사냥을 한 자가 우선하여 더 좋고 많은 양을 가져가는 식으로 무리의 우두머리가 포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그러다가 물물교환이라는 방식이 나타나서 서로가 이루어낸 것을 상응하는 가치의 것과 바꾸는 형태가 나타났고, 이후 농작물을 경작하고 가축을 기르게 되면서 그 일을 한 이들에게 해당 농작물과 가축으로 보상했을 것으로 보이니 그것이 최초의 직업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종교적으로 본다면 성경의 창세기에 하나님이 만물을 만들고는 아담에게 다른 만물들의 이름짓기를 시켰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에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는 최초의 직업은 아담에게 내려진 작명가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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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통일신라시대에서 왜 수도를 안 옮겼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통일신라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완전한 통일이 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무너졌으나 처음에는 당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고구려의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세력을 행사하는 등 하였고, 이후 신라와 연합할 당시 약속을 어기고 욕심을 보이자 신라가 되려 고구려부흥세력과 손을 잡고 당을 공격하는 등 나당전쟁을 하였습니다. 결국 나당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인해 당이 물러갔으나 그와 함께 대중상, 대조영, 걸사비우 세력이 과거 고구려의 영토와 주변 동맹부족영토를 아울러 고구려유민, 말갈 등과 연합하여 후고구려를 세웠고, 이후 국호를 진이라 바꾸었습니다. 후고구려의 세력이 너무 강성해지자 그것을 포섭하기 위해서 당에서는 713년 대조영에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습니다. 인정은 하나 자신들의 아래로 인정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대조영 때는 그대로 국호를 진이라고 유지하였고, 별도의 연호까지 사용하는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당의 국력이 강해 주변국들은 당의 판단을 기준으로 하였기에 국호를 발해로 외교적으로 하였다고 추측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고대국가의 영토 북쪽은 대진국 발해가 남쪽은 신라가 차지한 형국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수도였던 경주를 버리고 천도를 할 필요성이나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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