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유비가 아니라 관우가 대장이었다면?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정한다는 것이 어렵지만, 관우가 리더였다면, 유비, 관우, 장비의 세력은 국가를 이루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유비는 무예가 출중하지는 않았고 우유부단한 면이 있다고 하나 지혜롭고 겸손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실의 후손이라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삼고초려를 하는 등 하여 제갈량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였고, 인성과 명분으로 방통 등 많은 인재들이 함께 하였기에 그 세력을 공고히 다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우는 어쩌면 여포와 같은 부류이기에 극강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도 전장에서 그를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나 관우의 그러한 능력이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고 강하다는 자만으로 시야가 좁아질 것이고 그것이 그를 몰락하게 할 것이고, 그 세력들은 다른 세력에 흡수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유비처럼 촉을 건국하는 단계에 까지는 가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Q. 청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강화조약은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알고 있는데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의 확립 이외에 어떠한 것들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95년 4월 17일에 하관에서 조인, 5월 10일 발효되었다. 정식 명칭은 ‘청ㆍ일 양국의 강화조약입니다. 1894년 8월에 시작된 청ㆍ일전쟁의 강화 조약은 본문 14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히로부미가 체결하였습니다.그 세부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1.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 (청은 조선에 간섭하지 마라 우리 일본이 차지할 것이다 라는 흑심이 들어있음)2. 청국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와 타이완(臺灣) 및 평후섬(衝湖島)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3. 청국은 일본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4. 청국의 사스(沙市)ㆍ충칭(重慶)ㆍ쑤저우(蘇州)ㆍ항저우(杭州)의 개항과 일본선박이 양쯔강 및 그 부속 하천의 자유통항인 용인,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ㆍ영업ㆍ무역의 자유를 승인한다. 이 중 랴오둥반도의 할양에 대해서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이 그 반환을 일본에 요구하게 되어 일본은 3000만량을 청으로부터 받고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였습니다.[세부내용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시모노세키 조약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Q. 신하들이 신돈을 싫어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돈은 승려로서 공민왕 중기 책사의 역할을 하며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던 인물입니다. 공민왕 주기 급성장한 무장세력과 권문세족들을 숙청하는데 공을 올렸으며, 사회 개혁을 단행하는 개혁가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왕의 승려인 국사로서 국정자문 수준의 간언하는 것이었으나 왕이 그에게 의지하고 많은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신돈도 다른 신하들이 왕과 접촉하는 것을 제한하고 흡사 자신이 왕인양 모든 것을 결정하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돈 자신이 그렇게 했다기 보다는 무인세력과 권문세족들의 권력으로부터 왕권을 재확립시키기 위해 공민왕이 신돈을 도구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운 부분입니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전권을 부여받고 짧은 기간 동안 신흥무장세력 및 힘있는 권문세족들을 모두 숙청하였습니다. 이런 후 신돈 집권 당시에도 그가 흉상이라며 멀리하라고 신하들이 간언하였고, 군신관계를 어지럽힌다고 상소하였지만 공민왕은 되려 이들에게 벌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왕권을 확립하고 신흥무장세력과 권문세족들의 득세가 잠잠해지자 공민왕은 자신의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신돈이 사심관제도를 부활시켜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립하려는 것을 부결시켰고, 수도를 충주로 천도할 것을 신돈이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민왕 19년 신돈을 매개로 한 정치를 마치고 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공민왕 20년 신돈을 역모의 죄를 물어 죽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볼 때 신돈은 공민왕의 왕권을 확립하고 신흥무인세력과 권문세족들을 숙청하고 새로운 통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신돈의 모습은 신하들의 눈에는 암적인 존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니 생김새와 여러가지 비리들을 내세워 왕에게서 멀어지게 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흐름이 공민왕이 계획한 것이었다면 공민왕이야 말로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Q. 고구려 때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왕, 그 왕의 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 때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왕은 장수왕입니다. 장수왕의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1. 남진정책아버지인 광개토태왕은 북진을 추구하여 영토를 넓힌데 이어 남진정책으로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기고, 신라, 백제의 성을 차지하여 영토를 넓혔으며, 중국 남조의 여러 왕조와 북위, 북조와 화친을 맺고 조공외교를 하여 남진 중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것을 방지하는 외교를 펼쳤습니다. 2.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황제국으로서의 면모 연가, 연수, 건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사료에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충주 고구려비를 세워 선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는 등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인 황제국으로서의 기상을 드높였습니다. 3. 국내 정세의 안정 추구집권 초중기에는 남진 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한 후 후기에는 내정에 집중하였습니다.
Q. 김장은 왜 꼭 매년 겨울에 하는 걸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김장은 배추를 소금에 절여 갖은 양념과 고춧가루를 넣어 만든 우리나라 고유의 저장음식입니다. 비닐하우스 재배기술이 없고,냉장시설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던 과거에는 추운 겨울에는 신선한 야채 등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늦가을~초겨울에 배추나 무 또는 다를 채소들을 소금어 절여 젓갈 등과 섞어 동굴에 저장하거나 항아리를 그늘진 땅 속에 묻어 천천히 발효시켜 추운 겨울을 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추가 조선시대에 들어왔고 그 김치에 고춧가루를 넣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배추나 무의 섬유질과 각종 영양소, 고춧가루의 비타민C, 젓갈의 단백질, 소금의 미네랄, 찹쌀풀의 탄수화물 등 완벽한 영양소를 가진 음식입니다.지금은 재배기술이 발달하여 사시사철 배추 등 채소를 구할 수 있습니다만 김장배추는 8~9월에 모종을 심고 11월 경에 수확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풍습으로 11월~12월초까지 김장을 하여 추운 겨울 먹거리를 장만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겨울에 강이 얼어 고기를 잡기도 어렵고, 비닐하우스 기술이 없어 다른 작물을 기를 수도 없어 겨울에 김장을 하는 것은 겨울나기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Q. 술을 마시면 담배가 땡긴다고 하는데요 왜 이런 증상이 일어나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술의 주성분인 알코올은 중추신경계에 작용해서 내인성 오피오이드인 도파민을 분비시킵니다. 담배의 니코틴 성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금연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술을 마셨을 경우 도파민 수용체가 활성화되어 비슷한 작용기전을 가진 니코틴에 대한 욕망이 상승됩니다. 이것은 술, 담배, 커피(카페인)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나타냅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프라이밍 효과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제어할 수 있으므로 불가항력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금연 중이신 분이라면 가능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술, 커피 등은 완전하게 절연할 때까지 가능한 자제하시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