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주도(술자리예절)는 우리나라에만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술자리 예절은 외국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에는 특별히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함께 술자리를 한 사람이 잔에 채워진 술을 마시게 되면 잔에 술이 남아있더라도 가득 채워주는 첨잔이 예의있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도 건배 후 한번에 술잔을 다 비우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합니다. 장판 깔 듯이 약간 남겨두면, 그 위에 잔을 다시 채워주어 마신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경우 손님을 초대한 경우 자기 스스로 잔을 채워서는 안되고, 손님의 잔이 비어있는 것을 그대로 두어도 예의에 어긋난다고 합니다. 독일에서 건배사를 외칠 때 잔을 눈높이까지 들었다가 가슴에 가져간 후 상대방의 눈을 응시한 후 다시 잔을 들어 마십니다. 이것은 예의도 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7년간 연애를 못한다는 미신도 있다고 합니다. 스페인은 살루트 아무르 이페세타스 또는 샬룻을 외치며 잔을 세번 부딫히고 마신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권주문화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 술을 권했을 때 그것을 거절하게 되면 인정이 없고 예의가 없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영국사람들은 함께 술자리를 한 사람이 나의 술잔을 계산하였다면, 다음 술잔은 내가 계산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여러 사람이 있다면 한명씩 돌아가면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 외에도 여러 나라의 술문화와 예의범절이 있을 것 같습니다.
Q. 괴테의 명언 중에 전하고 싶은 말인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식한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은 배우지 못해 지식이 모자라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뜻으로, 모르는 것은 독서나 교육을 통해 배워가면 된다는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허위의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두려워 하라'는 말은 차라리 모르면 나서서 아는 척을 한다던가, 그에 따른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인데,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그릇된 신념이 되어 나 자신과 나아가서는 사회에 악을 끼칠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의미입니다. 종합해서 보면 괴테는 배우지 못하여 모르는 것은 지금부터 배워서 깨우치면 되지만, 잘못 배워 그릇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을 근거로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하여 자신과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Q. 동남아시아라고 부르는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남아시아라는 명칭으로 불리운 지는 근대에 들어와서입니다.2차 세계대전 중 해당 지역을 점령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1943년 실론(스리랑카)에 연합군에 의한 “south east asia command"가 창성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1839년 미국인 목사가 쓴 여행기의 제목에 "south-eastern asia"라는 이름이 거론되었었지만, 대륙만 포함했을 뿐 도서 국가들은 포함되지 않았기에 지금의 동남아시아와는 범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동남아시아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에는 과거 그 지역들이 대부분 유럽국가들의 식민통치지역이었기 때문에 해당지역명 또는 국가명 앞에 영국령, 프랑스령, 네덜란드령 등으로 불리었습니다. 동양에서 보는 시점으로는 당시 강국이었던 중국의 시점으로 볼 때 현재의 동남아시아 지역은 남양이라고 불리었다고 하고, 필리핀, 보르네오 등은 동양, 베트남과 그 주변 지역을 서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다 일본이 강국으로 떠오르고 메이지유신 이후 아시아를 동양, 유럽을 서양으로 호칭함에 따라 남양은 동남아시아만을 지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동남아시아의 범위에는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버마, 부루나이의 10개국이 속한다고 합니다. 필리핀의 경우 16세기까지는 외부와 단절된 상태였고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화 되었습니다. 1955년 초판본 동남아시아사라는 책에서는 필리핀은 제외되었었다가 1964년 개정판이 되어서야 포함되었으니 이 시점에 동남아시아의 지역 범위가 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역으로 보지 않고 문화적 공통성으로 본다면 스리랑카, 인도의 아쌈, 안다만 열도, 중국 운남성, 대만 등도 동남아시아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깊숙하게 연구가 되고 있는 듯 합니다. [참고 - 레포트샵 '동남아시아 지역연구 사건과 분쟁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명칭 유래 동남아시아' 샘플 보기 자료 참조]
Q. 한국은 왜 유일하게 음력 양력 두개 다 사용하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태양력의 경우에는 지구의 공전주기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계절을 정확하게 구분하는데 좋기 때문에 사용합니다. 태음력의 경우에는 달의 변화에 따른 공전주기(지구를 한바퀴 도는)를 측정한 날짜 계산으로 한달이 29.5일이 되어 농경사회에서 24절기에 따른 농업 및 달의 주기에 따른 간만조의 확인으로 어업에도 활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차가 생겨 계절이 맞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보정이 필요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하는 태음태양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음력과 태양력의 오차 11.25일를 보정하기 위해서 19년에 7번의 윤달을 넣어 계절과 맞게 보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약 3년 주기로 태음력이 13개월이 되게 하여 태양력과 태음력의 절기에 따른 계절이 맞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태음태양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태양력은 만국공통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표준과 계절의 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사용하고, 그것만을 사용해도 상관이 없으나, 과거부터 농경, 어업 생활을 기초로 살아오던 관습이 있고, 해당 절기(절기는 파종 및 수확 시기 등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중 명절로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태음력도 동시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실리와 전통을 모두 지키고 있는 것이니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Q. 나당전쟁이 일어나계된 계기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당 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데 이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삼국시대는 통일 신라시대로 이어지게 되는 혁혁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부터 삐걱대고 있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밀약인 삼국통일 후 동맹국으로서의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말을 믿었지만, 당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전체를 그들의 영역에 두려 했습니다. 먼저 백제가 멸망 후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항복한 백제의 왕 부여융을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이에 더해 당나라는 신라 땅에도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문무왕을 책임자로 임명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당나라는 신라를 그들의 지역으로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신라는 그들이 멸망시킨 백제의 땅을 그들의 영역으로 포함시키지도 못했고 망한 백제의 왕자를 대등한 입장에서 예우해야 했으며, 665년 당나라는 신라 문무왕과 백제 왕자 부여융을 지역의 도독으로 하여 상호 동맹의 맹약식 하도록 강요하게 됩니다. 이에 신라는 화가났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을 앞둔 시점에 당의 군사력이 필요했기에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때마침 고구려의 핵심세력들이 후고구려를 내세우며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기에 신라에게는 당의 눈을 돌릴 좋은 기회였습니다. 신라는 당나라를 상대로 한 본격적인 군사작전을 시작했습니다. 라는 옛 백제지역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면서 영토를 넓혀왔고 백제 유민들의 포용하며 백제 지역에서 지배권을 공고히 했습니다.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적극적인 외교전으로 신라의 주장을 관철하는 노력도 병행했고, 오랜 세월 신라와 교류 및 대결 관계에 있었던 왜와 외교적 소통을 하며 관계를 개선했습니다. 향후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한 일이었죠. 당나라 역시 이를 알고 있었기에 더 노골적으로 한반도 지역의 지배권을 강화하려 했고 신라 사신을 통해 그들의 의도를 명확히 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지만 전쟁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670년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과 연합해 요동지역의 당나라 군을 공격함으로써 나당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신라는 공세적으로 작전으로 당나라의 시선을 요동으로 돌린 이후 백제 영토를 차지하며 당나라 군을 내쫓았습니다. 신라는 지금의 익산 지역에 고구려 유민들이 그들의 나라 보덕국을 세우는데 지원을 하면서 고구려 유민들과의 관계를 강화 하며 우군으로 삼았고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 부흥을 위해 신라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도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개전 초기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신라군의 강한 저항에 당나라 군을 초반 밀렸다. 하지만 672년 석문 전투에서 신라의 주력군이 대패하면서 전세가 당나라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신라는 김유신이 673년 세상을 떠나면서 공세보다는 수성을 택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에 일종의 사죄단을 파견해 각종 진상품을 바치고 당나라의 선처를 구하는 식으로 당나라에 읍소를 하는 굴욕을 감수하는 등 저자세 외교로 당나라와의 전쟁을 피해가는 계책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전쟁 대비하여 여러 요충지에 성을 축조해 전력 거점을 확보하고 당나라의 남하를 막았습니다. 또한 신라 내부의 친당 세력들을 숙청하며서 내부를 결속을 다졌고 고구려, 백제 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위세를 키워갔습니다. 군사적으로는 당나라 군에 맞설 특화된 부대를 육성하고 무기를 개발하였는데 특히, 당나라의 주력인 기마병에 대응할 무기 배치와 함께 맞춤형 전술을 만들어 대비하였습니다. 신라는 이후 거듭된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전쟁의 승기를 잡고는 675년 지금의 동두천 지역에서 벌어진 매소성 전투에서는 3만의 병력으로 20만의 당나라 군을 격파하였고 서해 기벌포에서 당나라 해군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하며 당나라를 꺾었습니다. 이후 잔여 전투에서도 거듭 승리한 신라는 마침내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676년 나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는 확실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Q.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 중 가장 강한 나라는 고구려였으나 당시 오랜 기간 당과의 전쟁과 백제, 신라의 견제 등으로 쇠약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신라는 백제가 대야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당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게 되어 이를 복수하고자 고구려에 도움은 청하였으나 도움을 얻지 못하고 신라로 돌아가 복수를 계획하게 됩니다.고구려에서는 핵심 전력이자 권력가인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세 아들이 권력을 차지하고자 욕심을 부려 각자 그를 따르는 세력들로 내분이 일어났고, 그 중 장자인 연남생은 당으로 망명하여 역으로 고구려를 탐하게 됩니다. 같은 시기에 신라는 당에 고구려 백제를 함께 치자는 취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당은 신라를 돕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치고 한반도를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백이 선봉이었던 백제가 패하고 결국 멸망하게 되어 아래에서는 신라가 위에서는 당이 공격하였고, 고구려는 군부핵심세력이었던 연개소문도 없고, 권력싸움으로 내분도 있는 상황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멸망하게 됩니다. 고구려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충분히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으나 백제는 형제국가라 인정하고 머리를 조아리면 복속하지는 않았으며, 신라는 당시 가장 약소국으로 고구려에 도움은 요청하던 시기였으므로 자신들의 영향력에 있다고 생각했지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삼한의 한민족이니 힘을 합쳐 북진해야 한다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인정이 주변국이 힘을 키우게 된 패착이었습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장수 중 대중상과 그 아들인 대조영이 옛고구려 영토에 후고구려라 칭하며 대중상을 황제로 세우고 건국을 하고 완전히 자리를 잡은 대조영이 황제로 오른 뒤에는 국호를 진으로 바꾸고 대진국이라 불렀으며 연호를 따로 썼습니다. 당에서는 그 위세를 무시할 수는 없었으나 동등한 국가로는 인정할 수 없다 하여 낮추어 중국 발해군 지역을 근거로 하는 발해국왕이라 하사하였다 합니다. 당시 당이 가장 강력한 시기라 주변국도 발해라 불렀고, 당의 속국처럼 여겼었지만, 지금 밝혀지는 자료로만 봐도 독자적민 연호를 쓰고 유물에 황후라는 명칭을 쓴 것으로 보아 당과 대등한 국가였음이 분명하다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