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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인문 예술분야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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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철 전문가
철학연구소
Q.  조선 시대 경저리제도는 통일 신라의 상수리제도와 고려 시대 기인 제도와 비교했을때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고려 초기의 기인이 맡았던 임무인 각 고을의 공물 상납 및 연락 등을 담당하는 지방 각관의 분실로 경저를 서울에 두었습니다. 공물 상납을 위하여 상경한 공리(貢吏)들은 경저에서 숙박하는 것이 통례였고, 공납 물품도 여기를 경유하여 각사에 상납되었습니다. 경저에는 몇 사람의 경저리(京邸吏)를 두었는데, 그 장을 경주인(京主人)이라 하고 그 아래 서원(書員)·서리와 관노를 두었습니다.
Q.  일본왕실을 보통 백제계라고 알려저
안녕하세요.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의 후손이라는 기록은 분명 『속일본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란 다소 어려운 일입니다.
Q.  화교분들이 한국에 정착해서 살게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의 본격적인 시초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군이 주둔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의해 청나라군의 잡일을 도와주려는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에서의 상업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의 화교들은 인천과 직항이 있던 산동 지방 출신들로 대부분이 청나라군의 잡일 등을 도와주기 위해 왔다가 상업을 하기 시작했으며, 청나라군이 되돌아갔을 때 많은 자들이 산둥성으로 돌아갔지만 남아서 상업활동을 한 자들이 화교가 되었습니다.
Q.  향신료 후추의 역사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후추는 고려시대에 송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학자 이인로가 저술한 ‘파한집’에 처음 후추가 언급됐으며, 이로 미뤄 봤을 때 고려 중엽에는 이미 우리나라에 소개가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고려시대의 역사서 ‘고려사’에는 “1389년(공양왕 1년) 유구의 사신이 후추 300근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고려 말에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남방에서도 직접 후추가 유입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수입에 의존했을 뿐 아니라 그마저 소량이라 매우 귀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거래량이 줄어 가격이 더욱 올랐습니다.
Q.  고려시대 경제정책중 수취제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고려는 신라 말의 문란한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고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였습니다. 고려는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와 호구를 조사하여 토지 대장인 양안과 호구 장부인 호적을 작성하였고,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습니니다.조세는 토지를 논과 밭으로 나누고, 비옥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부과하였습니다. 거두는 양은 생산량의 10분의 1이었습니다. 거둔 조세는 각 군현의 농민을 동원하여 조창까지 옮긴 다음, 조운을 통해 개경으로 운반하여 보관하였습니다.공물은 집집마다 토산물을 거두는 제도입니다. 중앙 관청에서 필요한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나누어 주현에 부과하면, 주현은 속현과 향, 부곡, 소에 이를 할당하고, 각 고을에서는 향리들이 집집마다 공물을 거두었습니다. 공물의 종류로는 매년 내어야 하는 상공과 필요에 따라 수시로 거두는 별공이 있었습니다.역은 국가에서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동원하는 제도로,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정남이라 하여 의무를 지게 하였습니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 밖에, 어민에게 어염세를 거두거나 상인에게 상세를 거두어 재정에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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