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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코끼리20
친절한코끼리2023.07.03

삼국지 위나라에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는데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삼국지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인데

위, 촉, 오 중에서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한 사실이 있다고 하던데 이것이 사실인가요?

촉나라와 오나라와 다투느라 국력이 분산할 틈이 있었던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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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 고구려 3세기 중엽 동천왕 때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으로 인해 고구려는 멸망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위나라는 244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고 고구려를 공격했는데요. 이 관구검은 낙랑 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존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의 서남부를 견제하고 수도인 환도성으로 진군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위나라의 공격은 고구려의 중앙 집권 국가 발전을 위협하며, 고구려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오히려 위나라와의 전투로 인해 고구려의 국력이 분산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위나라의 침입으로 인해 고구려가 방어 전선을 확장하고 군사력을 분산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던 고구려는 세력이 위축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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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와 위나라는 242년, 244년, 245년, 259년에 걸쳐 전쟁을 했습니다.

    결과는 위나라의 승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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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나라의 고구려 침공, 삼국지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지만..
    고구려 역사에서는 큰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나라로서는 후방의 공격을 대비한 이민족 정벌이며,
    고구려로서는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운 큰 전쟁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위나라의 고구려 침공과 관구검에 대해 알아봅시다.

    1. 고구려, 삼국시대에 뛰어들다.

    고구려 제11대 동천왕이 재위에 올라 있었을 쯤..
    당시 공손씨와 고구려는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옛날 발기와 연우(산상왕)과의 왕위다툼에 공손씨가 개입하여
    고구려 땅 일부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사실 공손씨와 고구려는 서로 경계하고 대립하였는데..
    이 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공손연이 연나라를 세우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위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었고 고구려는 이에 위나라와 힘을 합하여
    공손씨의 배후를 쳐서 공손씨를 멸망시킵니다.
    이렇게 사이좋던 위나라와 고구려가 왜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일까?
    고구려는 위나라가 촉오의 남부전선에 치중하고 있는 줄 알고
    요동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뭔가 실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제갈량은 죽고 촉나라는 방어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오나라 또한 국지전에 머물렀기 때문에 위나라의 국력은 강성하여 넘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마당에 고구려가 배후를 친답시고 요동을 공격한 것은 큰 실수였지요.
    결국 위나라는 배후의 공격을 당하자 장수 관구검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에 나섭니다.

    2. 관구검, 그는 누구인가?

    관구검은 자가 중공이고 하동군 문희현 사람입니다.
    명제(조예)의 아들과 친하여 명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사마의를 도와 공손연을 정벌하였습니다.
    명제는 그에게 유주자사와 도요장군, 호오환교위를 맡게 하였으며
    그는 오환족을 끌어들임으로서 북방에서 입지를 굳힙니다.
    이 때, 고구려가 요동을 침공하였으므로
    북방을 맡고 있던 관구검이 정벌에 나섰고..
    그 공으로 좌장군 등 승진했고 이후 오나라와 전투에서 군공을 세웁니다.
    그러나 관구검은 사마씨의 독재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서 사마씨와 대립하지만..
    점점 전세가 사마씨에게 기움으로써 안풍진 도위가 관구검을 죽였고
    이로써 '관구검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3. 고구려vs위나라

    관구검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동천왕(위궁)은 2만의 군대로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위군의 우세로 점쳐졌던 전투는 의외로 예상 밖 결과를 냅니다.
    바로 고구려군의 승리로 위군 3천여 명을 전멸시키는 쾌거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하지만 동천왕은 자만에 빠진나머지 신하 득래의 충고를 무시하다가
    관구검의 유인책에 걸려 사방의 공격을 당해
    고구려군 1만 8천여 명이 죽음을 당하고 동천왕은 겨우 1천 여명만을 데리고
    압록원으로 퇴각하는 뼈아픈 패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구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현도태수 왕기를 보냈고,
    환도성을 빼앗기며 남옥저로 패주합니다.
    다행히도 밀우, 유옥구가 위군을 저지하고
    유유가 적장을 암살함으로써 위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위나라와 고구려의 전투는 사실 국제전이었습니다.
    선비족과 부여가 각각 병사와 군량을 위군에 보급했고
    백제는 위나라 낙랑군을 공격하는 등 역사상 동아시아 첫 국제전이었습니다.
    또한 동천왕이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충신 밀우, 유옥구, 유유가 나온 까닭은
    동천왕이 어질고 인자한 후덕한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동천왕이 죽자 그를 따라 죽으려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만주에는 아직도 관구검이 만든 관구검공적비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뼈아픈 역사이기도 한 역사의 한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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