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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한하마253
근면한하마25323.11.02

청계천의 역사와 변천 과정이 궁금합니다.

서울 한복판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는 물길인 청계천 역사속에서 많은 발전을 이룬 곳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까지 다양한 변화를 가지고 왔는데요. 이러한 청계천의 역사와 변천과정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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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태종 대에 하천 양변에 돌 축대를 쌓고, 얕은 곳을 파내는 공사를 진행하여 청계천의 물길을 다스리는 '개천(開川)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의 경계였으며 민족의 거리 종로와 왜인들의 마을 혼마찌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 청계천 일대 복원사업이 진행되었으며2005년 10월 1일 자연하천과 인공하천이 혼합된 형태의 하천으로 재탄생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래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 태종때부터 한양을 서울로 한 조선시대 내내 개거, 준설 등 치수 사업의 대상이었습니다.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상태에 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았으나 큰비가 올때마다 피해가 계속되었고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을 설치, 이듬해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큰 공사를 실시합니다. 청계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로 만들었고, 개천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 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이름이 됩니다.

    세종은 청계천의 지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종로의 시전행랑 뒤편에 도량을 파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 도심의 홍수를 예방, 세종은 1441년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수위를 측정할수 있게 했습니다.

    세종 이후 준설이 없어 토사가 지속적으로 쌓여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르자, 영조는 1760년 2월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가산을 쌓게 하고, 오간수문 안쪽에 있던 것으로, 하나는 개천 북쪽에 , 하나는 개천 남쪽에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도시의 근대화에 따라 사라졌고, 현재는 오간수교 위에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때의 준설과정을 준천사실로 기록, 개천의 물 흐름에 관심이 많던 영조는 1773년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오간수문 근처까지 석축을 쌓고, 이를 통해 구불구불한 하천이던 개천을 영조가 호안공사를 통해 직선화 시킵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한국 전쟁 직후의 서울시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 청계천 복개사업으로, 이는 일제강점기나 1955년에도 일부 이루나, 청계천이 본격적으로 복개된 것은 1958년부터로, 1958년 5월~1961년 12월까지 광교~ 청계 6가구간, 1965년~1967년 청계 6가~청계 8가 구간, 1970년~1977년 청계 8가~ 신답철교 구간이 복개되며 이 복개된 청계천 위에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됩니다.

    1900년대 들어 청계천의 복개 구조물과 노후한 청계고가도로의 안전 문제가 대두, 이에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을 공약, 32대 시장으로 당선, 2003년 7월 1일 청계고가도로의 철거가 시작,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에 이르는 약 5.84km의 구간을 복원하는 공사는 3867억 3900만원을 들여 2005년 9월 30일 완료합니다.

    복원된 청계천의 통수단면 위쪽을 흐르는 물은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의 지하철 역 부근의 지하수를 정수, 소독처리해 조달, 통수단면 아래쪽을 흐르는 물은 도심의 오,폐수 입니다.

    청계천 장통교 옆 벽면에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을 행차하는 것을 그린 반차도를 타일로 옮겨놓은 벽면 예술, 다산교와 영동교 사이 복원해 놓은 복개 이전에 아낙네들이 빨래를 한 청계천 빨래터, 청계천 복원 사업에 맞추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만든 타일 벽인 소망의 벽 등이 시설물로 설치, 존치교각이라는 이름으로 옛 청계천 고가도로의 교각을 3개 남겼고, 청계천 입구의 청계광장에는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가 설계해 KT 가 서울시에 기증한 소라탑 이라는 작품이 설치되었습니다.

    서울특별시는 2050년까지 장기 계획을 세워 청계천을 역사와 전통이 있게 복원하기로 결정, 이 계획에 따르면 2018년까지 청계천의 인공 보를 철거, 2030년까지 수표교 등의 유적을 제자리에 옮겨놓으며 중, 하류 수질을 개선, 백운동천이나 삼청동천의 계곡수 또한 이때까지 유입시키기로 결정, 최종적으로 2050년까지 옥류동천과 남산동천을 청계천으로 잇기로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천년 전인 1096년 고려시대에는 남경(서울)천도를 시도했으나 못했고 1394년인 조선시대에 한양 천도가 이뤄졌습니다. 북한산 인왕산 남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며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치수시설이 없던 시기에는 장마철에 범람하여 행랑과 민가에 피해입히기가 일쑤였습니다. 1406년 조선 태종은 청계천 정비를 시작하여 바닥을 끍어내고 양쪽 기슭에 둑을 쌓았습니다. 1412년 5만 2800여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정비했고 이때 만들어진 다리가 광통교와 혜정교 같은 돌다리였습니다. 조선시대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청계천을 명당수로 유지하고자 했으며 하수도로써의 역할도 담당해왔습니다. 청계천은 서울 종로구와 중구를 거쳐 왕십리까지 이어집니다. 물길의 흐름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다 한강을 만나 다시 서로 흐릅니다. 10.84km에 달하며 수백년 간 도심하천의 역할을 하다 복개공사로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었다가 이어진 복원공사로 물이 흐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수없이 복원과 개발의 연속이었습니다. 1960년에 복에하였고 47년 만인 2007년에 복원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계천은 본래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 태종때부터 한양을 서울로 한 조선시대 내내 개거, 준설 등 치수 사업의 대상이었ㅏ고 합니다. 조선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았으나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고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으며, 위생 면에서나 도시경관 면에서 청계천을 그대로 두고 서울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기에 기초적인 생활필수품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웠던 당시 우리 나라의 경제상황 속에서 청계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유일한 방법이 '복개(覆蓋)' 공사 였습니다. 2003년부터 복원사업이 다시 진행됐고 지금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노니는 생태 하천으로 거듭나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쉼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