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집단 학살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캄보디아의 역사 중에서 집단 학살이 일어났던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캄보디아에서 킬링 필드라고 불리는 집단 학살이 왜 일어났나요?
안녕하세요. 이장수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캄보디아 집단학살(Cambodian genocide)은 1975년에서 1979년의 5년동안 민주 캄푸치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이 1백 5십만 명 ~ 3백만 명을 죽인 일 입니다. 크메르 루주는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에 기반한 농업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도시 인구를 강제이주시키고, 저항하는 자에 대해서는 고문, 학살, 노역이 가해졌습니다. 그러면서 농업정책도 실패하여 캄보디아 인구의 25퍼센트가 크메르 루주의 학살 및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를 실각시킴으로써 집단학살은 끝났습니다. 현재까지 20,000 개가 넘는 집단매장지가 발굴되었으며, 이러한 집단매장지를 소위 킬링필드라고 부릅니다.
크메르 루주 지도부는 학살이 시작된 것이 “인구의 정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2001년 1월 2일 캄보디아 정부는 크메르 루주 지도부 일부를 심판대에 세우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고 2009년 2월 17일부터 공판이 시작되었고, 2014년 8월 7일 누온 찌어와 키우 삼판에게 반인륜범죄 혐의에 대한 유죄 및 종신형선고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75년 크메르 루지에 의해 친미 정권 논놀 정부가 무너지고 캄보디아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기를 맞이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킬링필드의 2막이 오른 거지요.
제 1 막은 베트남 전쟁을 위해 미국이 "호치민 루트(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과 캄보디아의 국가원수 시하눅 왕자가 맺은 밀약에 의해 북베트남군, 소위 베트콩이 캄보디아로 우회하여 남베트남을 공격하는 이동로)를 폭격한다는 미명하에, 국제적 협약과 미국 내의 법도 무시한채 비밀폭격을 가하고(이 폭격으로 민가 약 200만채가 파괴되고, 최소한 80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합니다.), 미국 하수인 논놀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미명하에 자국민 약 50만명을 처형하는 폭거가 바로 제 1차 킬링필드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정부는 민심을 잃은지 오래였고, 밀림 속에 숨어 있던 크메르 루지는 북경에 망명해 있던 시하눅의 도움으로 북경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캄보디아 내의 반 정부군으로, 미국에 의해 쫒겨났던 전 왕 시하눅을 복위 시키겠다는 명분으로 결성된 "엉까"를 흡수하여 국내 최대 무장세력이 되면서, 의기양양하게 프놈펜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여 손쉽게 논놀 정부를 전복한 것입니다.
이 당시에 앞장 서 있던 지금의 훈센 총리는 나이 20살에 밀림 속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1975년 4월 16일 프놈펜 공격 도중 수류탄 파편에 의해 왼쪽눈을 실명하는 부상을 입게 됩니다.
크메르 루지는 국민의 지지를 받아 공산화에 성공을 한 뒤, 공산당 특유의 의심과 불신으로 인해 숙청작업을 단행하게 되고, 크메르 역사를 수 백년이나 뒤로 돌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됩니다.
이들이 채 3년을 못채운 상태에서 민심은 완전히 이반 되었고, 모든 지식인들을 죽이는 폭거를 저지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담보로 한 탈출을 감행하게 되었으며, 동북부 지역의 사령관으로 있던 훈센도 나이 22살에 2성 장군이 되었지만, 골수 공산주의 출신이 아닌 "엉까"출신이라는 이유로 숙청대상에 포함되자 베트남으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1978년 내내 크메르 루지 공산 정권은 베트남의 호치민과 자신들을 지원한 시하눅 전 왕간에 맺었던 호치민 루트의 밀약에 따라 공산화에 성공한 지금의 베트남 정부를 향해 60년 전에 프랑스에 의해 강제로 베트남 영토로 편입된 지금의 호치민 시 남부 지역의 메콩 델타를 돌려 달라는 요청이 묵살되자, 이제는 무력으로 찾겠다며 베트남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베트남의 포로 수용소에 있으면서 베트남 정부에게 베트남 군이 아닌 포로수용소 안에 있는 캄보디아 군인 8만여명을 무장만 시켜주면 캄보디아로 우리가 올라가겠다며 탄원을 해 온 훈센과 그의 정치적 아버지라는 헹삼런은, 지금의 베트남 국가 주석이며 당시 군 총사령관이었던 "응웬" 장군에게 더더욱 적극적인 브리핑을 하게 됩니다.
호치민으로 육박해 오는 크메르 루지의 군대를 소탕하기 위해 베트남이 결심을 하게 되고, 드디어 1978년 12월 24일 총 공격을 시작하여 불과 2주도 안된 1979년 1월 7일 베트남 군에 의해 프놈펜이 함락되면서 크메르루지는 정글로 도망을 가게 되며, 베트남군을 따라 무장을 하고 들어온 포로 수용소의 캄보디아 군을 이끌던 행삼런이 국가 주석이 되고, 훈센은 28살이라는 최연소 기록을 내면서 외무부 장관이 됩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프놈펜의 행삼런 정권은 전국의 80%를 장악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글 속에 숨어 있는 살인마 집단, 킬링필드 학살로 100만이 넘는 동포를 살상한 크메르 루지가 UN에서 캄보디아 대표권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을 베트남에서 쫒아낸 공산 정권의 지원을 받아 탄생한 정부라는 이유로 "행삼런 괴뢰 정권"으로 서방세계는 물론 대한민국에게서도 지탄을 받는 행삼런 정권과 맞선다는 명분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던 중 1985년에 호주,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베낭여행을 왔다가 크메르루지 공산군에게 체포 된 후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을 중심으로 뭉쳐 있던 서방세계가 캄보디아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하기 시작하였고, 조금씩 크메르 루지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베트남 군은 10년을 캄보디아에 주둔하게 되고, 1990년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 회담이 열리면서 그 직전인 1989년부터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의 꼭둑각시 정권이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는 행삼런 정권은 32살의 훈센에게 총리직을 맡기면서 이 역시 최 연소 기록을 갱신하게 되는데, 파리평화 협정의 체결 이후 총선을 통해 1993년에 지금의 캄보디아 정부가 탄생을 하고, 시하눅은 국왕으로 재 등극을 한 것입니다.
당시는 물론이고 1998년 크메르 루지의 최고 지도자 폴폿이 정글 속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며, 크메르 루지 반군이 정부군에 완전히 항복을 하거나 체포되기 전까지는 캄보디아는 내전 상태 그대로였으며, 치안은 극도로 불안한 상태이고, 멀리 떨어진 나따냐끼리나 몬돌끼리 등에서는 국방부 장관의 명령이 묵살 되는 현실이었습니다.
결국 베트남이 철수한 뒤에도 불안한 정정 때문에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베트남의 무력 시위가 몇번 있었고, 지속적인 훈센 정부를 지원하는 것을 놓고 말이 많았으며, 그 중 하나가 앙코르 왓의 입장권 수입에 몇 %는 베트남 정부가 가져가는 조건으로 철군을 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돌기도 했습니다만, 미안하지만 앙코르 왓의 입장 수입은 캄보디아 정부가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유네스코를 비롯한 16개의 세계 각국과 단체가 모여 만든 "압사라"라고 하는 유적보존위원회에 의해 자금의 지출이 집행됩니다.
물론 캄보디아 정부가 많은 비율을 가져가기도 하지요.
베트남이 철군하면서 많은 베트남 군인들이 캄보디아에 민간인으로 정착하여 남게 되었고, 실제로 정부 요직과 국회에 진출한 사람도 굉장히 많은 상태인 것은 분명합니다만, 철군 당시만 해도 앙코르 왓이 세계적인 관광지로 준비도 되지 않았으며, 철군이 완료된 이후 8년여가 지난 1998년부터 외국인 관광객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미국 정부의 말을 듣지 않던 훈센 정권에 대한 대부분의 루머는 사실이 아닌 것이 많습니다.
더구나 앙코르 왓의 입장수입을 외국 정부에 얼마를 떼어 준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이야기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점령당했다. 이를 틈타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은 1945년 3월 12일에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1946년에는 다시 프랑스의 보호 하로 돌아와 독립이 무효로 돌아갔으나 끈질기게 독립 운동을 계속해 1947년에는 헌법을 공포하였고, 1949년에 프랑스 연합 내에서 독립할 것을 선언하였다. 1953년에는 경찰권, 군사권을 회복해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 시아누크는 비동맹·중립 외교 정책을 표명했다.
1965년 5월, 시아누크는 북베트남에 폭격을 행하는 미국에 대해 수교 철회를 선언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어수선한 동남아시아였지만 시아누크 정권 시기에는 내전이 격화되지 않았고, 식량이 풍부하여 수입에 의지할 필요도 없었으며, 대량의 난민도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구 열강으로부터 어느정도 벗어난 중립외교를 표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직후 동부 캄보디아 지역은 사실상 북베트남의 실효 지배 하에 있었으며 대규모 지하 터널 네트워크를 통한 보급(호치민 루트)을 확보하고 있었다. 미군에 의해 '성역'으로 지칭되던 이 지역에 타격을 주기 위해 미국은 국제법을 위반한 '비밀 작전'을 추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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