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가 평민에서 어떻게 여황제까지 되었나요?
측천무후가 살던 시대에서는 여성으로서 공직에도 오르기 힘들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여황제가 될 수 있었던 건가요?
더군다나 왕족이나 귀족 신분도 아닌 평민 신분이었다고 하는데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녀는 중국 최초의 여황제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와도 많은 연관이 있는 황제랍니다.
그녀에 대해서 중국의 여황제다, 역대 최고의 악녀다, 라는 평가만 주목받지만 사실 알고보면 정치적, 군사적으로 나라를 매우 잘 꾸려간 황제였습니다.
측천은 그녀의 본명이 아니며, 본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단, 그녀 스스로는 자신의 이름이 '조'였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녀의 이름이 '무조'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무측천은 624년, 수나라 태원유수 이연의 수하인 무사확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점점 이뻐지게 된 그녀는 황궁에 들어가게 되고 황궁에 들어간 그녀는 재인에 뽑힙니다. 황제의 후궁으로 그리 높지 않은 품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무측천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무미랑 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곁에 두고 아끼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뒤 하늘에 상서로운 기운이 보이며, 그것이 궁 안의 여성의 기가 세서 하늘의 운이 변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당시 당나라에는 세명의 황제가 나온 후에 무씨 여인의 천하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를 껄끄럽게 여긴 황제는 무측천을 멀리합니다. 이 사이에 무측천은 태자, 즉 황제의 아들과 눈을 맞게 되죠.(그래서 악녀란 말도 있습니다.)
태종이 죽고 무측천은 일단 감업사에서 비구니가 됩니다.하지만 이미 고종과 머지않아 자신을 황궁으로 데려갈 것을 약조한 상황이었죠.
대신들의 반대에도 결국 무측천을 다시 궁에 들이게 됩니다. 측천무후는 고종의 아들을 낳고 이 아이가 첫째아들 이홍(李弘)입니다. 측천무후는 점점 황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야심을 키워갑니다. 고종이 왕이 된지 5년째인 654년, 측천무후는 공주를 낳습니다. 그녀는 왕후가 되기 위해서 결국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아이를 죽입니다.
그 때 왕황후가 공주의 100일을 축하하러 처소를 방문하고나서 돌아갔고, 왕황후가 방문하고 돌아가자마자 공주가 죽었으니 그 혐의가 왕황후에게 씌어져 결국 왕황후는 강등되고 측천무후가 왕후에 오릅니다. 왕후가 된 측천은 다시 왕황후나 소숙비가 왕후가 될까봐 그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아픈 왕을 대신에 국정을 운영하게 됩니다.
그 후로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왕이 될 자신의 아들들을 다 죽이고 막내아들만 허수아비로 놔둔채 왕의 권력을 갖게 됩니다. 그녀는 잔인했지만 군사적으로 나라를 강하게 했고, 국가제도를 완전히 개혁하고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를 단행했습니다.정치적으로는 귀족 위주의 관리 등용에서 벗어나 능력있는 선비를 등용하려 과거제도를 시행 하였으며, 백성의 소리를 듣기 위해 '진실의 함' 을 도입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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