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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4

조선시대 관리를 선발한 과거시험에서 무과, 문과, 잡과 중에서 잡과는 누구를 어떻게 선발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조선시대 나랏일을 하는 관리를 선발한 과거시험에서 무과, 문과, 잡과 중에서 잡과는 누구를 어떻게 선발하였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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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역과 · 의과 · 음양과 · 율과)가 있었는데 통칭하여 제과(諸科)라 하였다. 문과는 다시 대과(大科)주25와 소과(小科)주26로 나누어지나 흔히 문과, 생원시 · 진사시로 일컫는다. 문과와 생원시 · 진사시, 잡과는 예조에서, 그리고 무과는 병조에서 주관하였다.

    과거시험에는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와 국가의 경사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실시하는 부정기 시험이 있었다. 식년시와 증광시에는 모든 과거 시험을 다 실시하지만, 별시(別試) · 알성시(謁聖試) · 정시(庭試) · 춘당대시(春塘臺試) 등 비정기 시험의 경우에는 문과와 무과만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식년 초시를 식년주27 1월에서 5월 사이에 실시하였으나 농사에 지장이 있다 하여 식년 전 가을에 실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초시에 합격한 후 복시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는 한 차례만 주어졌다. 명 · 청 제도와는 달리 초시에 합격한 후 복시에 응시하지 못하거나 낙방한 경우에는 다시 초시부터 응시해야 하였다. 다만 기복친(朞服親)의 상을 당하여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거나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초시에 합격한 경우에는 사정을 신고하면 다음 번 시험으로 응시를 미룰 수 있었다.

    1437년(세종 19) 이후 과거 시험장을 1소와 2소로 나누었다. 시관의 자제나 친척 등의 상피인을 다른 시험장으로 보내 과거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분소법(分所法)은 불편함도 적지 않았다. 시험장에 따라 시관이 다르고 시험 문제가 달라서 응시생의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국처럼 과거 전용 건물이 없던 조선에서는 대청과 넣은 마당이 있는 곳을 골라 시험장으로 삼았다.

    시험관은 복수 시관제로 상시관(上試官)주28 · 참시관(參試官)과 감시관(監試官)주29이 임명되었고, 전시의 경우 대독관(對讀官)과 독권관(讀卷官)인이 임명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시험관은 고려시대의 지공거와 같은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상당히 제한된 업무만을 하게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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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리함
    누리함23.05.24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기술관은 특수한 기술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총칭합니다. 여기서 ‘기술(技術)’이란 요즈음의 테크닉(Technic)이란 의미보다는 ‘예능(藝能)’, 즉 실용적인 기술을 의미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기술학을 잡학이라 하였으며, 이에 종사하는 사람, 즉 기술관을 잡업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기술관은 여러 기술학 생도를 비롯해 현직 및 전직의 역관⋅의관⋅천문관⋅지관(地官)⋅산관(算官)⋅율관(律官)⋅화원⋅도류(道流)⋅금루관(禁漏官)⋅악생(樂生)⋅악공⋅상도(尙道)⋅지도(志道)⋅선화(善畵)⋅선회(善繪)⋅화사(畵史)⋅회사(繪史) 등을 말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기술관들의 임무는 국가의 외교⋅보건 후생⋅사회 생활⋅과학⋅예술 등 거의 모든 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양반들이 누리던 유교 문화를 더욱 꽃피우기 위해서 이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이에 양반 사대부들은 기술학이나 기술관을 천하게 여기면서도 그 필요성을 깊이 인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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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잡과의 종류는 총 4가지 인데 이과(吏科)·역과(譯科)·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 등 4과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과 이외에 이문과(吏文科)도 잠시 실시된 적이 있었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이 2과 대신 율과(律科)가 첨가되어 역·의·음양·율의 4과가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시험과목은 전문서(專門書)·경서(經書)·『경국대전』을 필수과목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각 과목은 통(通)·약(略)·조(粗)로 채점하는데 통은 2분(分), 약은 1분, 조는 반분으로 계산하여 분수가 많은 자를 선발하였다고 합니다. 양반자제들은 잡과를 천시하여 응시하지 않았고, 대체로 기술관의 자제나 향리·교생·서얼·양가자제들만이 응시하게 되었으나 교생이나 양가자제들은 잡과를 통해 중인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으므로 잡과는 하나의 신분이동통로로 이용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술직은 점차로 기술관들에게 세습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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