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협약.. 영유권 갈등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간도협약은 한국의 민간(간도되찾기운동본부)과 중국 정부에 중대한 문제로 남은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라고 들었습니다.
간도협약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간도협약은
1909년(융희 3) 9월 청나라와 일본이 간도(젠다오)의 영유권 등에 관하여 맺은 조약을 말합니다.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국권을 빼앗아 간 뒤인 1909년 9월, 청나라로부터 남만주철도 부설권(선양-다롄)을 보장받은 대가로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청나라 측 해석을 그대로 인정,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일제는 간도 지방에 대한 관리 권한을 청에 넘겨주었고, 이로 인해 간도는 우리의 외교권이 불법적으로 상실당한 상태에서 맺어진 간도협약에 따라 청의 영토로 귀속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간도협약은 제1조에 "청ㆍ일 양국 정부는 두만강을 한ㆍ청 경계로 상호 성명하고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를 경계선으로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이때부터 1950년대 말까지 한-중 국경선은 두만강 상류인 석을수로 확정되고 말았습니다.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간도는 백두산의 주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압륵강과 두만강의 웟쪽 지역인 만주를 일컫는 지역입니다. 조선이 여진을 진압하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다스리던 지역이었습니다. 청일전쟁으로 일제의 한반도에 대한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청나라의 간도확보라는 것을 일제는 인정해줍니다. 이는 당사자인 조선을 배척하고 자기들끼리 인정하고 주고 받는 등 인정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나라는 19세기 말기부터 간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여 군대까지 투입하고 지방관까지 두었으나, 한국도 그에 강력히 맞서 영토권을 주장하였으므로 간도영유권 문제는 한·청 간의 오랜 계쟁문제(係爭問題)였다.
일제는 1905년(광무 9)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청나라와 간도문제에 관한 교섭을 벌여 오다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撫順]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① 한·청 양국의 국경은 도문강(圖們江:토문강)으로서 경계를 이루되, 일본 정부는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청나라는 도문강 이북의 간지(墾地)를 한국민의 잡거(雜居)구역으로 인정하며, ② 잡거구역 내에 거주하는 한국민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고, 생명·재산의 보호와 납세, 기타 일체의 행정상의 처우는 청국민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③ 청나라는 간도 내에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개처를 개방하며, ④ 장래 지린[吉林]·창춘[長春] 철도를 옌지[延吉] 남쪽까지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會寧) 철도와 연결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것으로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한 기지를 마련하는 동시에, 남만주에서의 이권을 장악하고, 조선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폐쇄하는 대신 일본총영사관을 두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하게 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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