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때 미군이 북진을 하다가 남쪽으로 다시 철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6.25 전쟁에서 최초 전쟁 발발 후에 고전하다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고 미군이 북진을 하였는데 북진하다가 다시 찰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반도 전체가 자유주의 세력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말씀하신대로 국군과 UN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서울 수복, 평양 점령,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갑니다. 당시 북한군은 거의 괴멸 직전까지 갔고
잔세력들이 백두산 인근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
습니다. 그런데 중공군이 대규모 군대를 보내서
국군과 UN군을 공격하였고 당시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에 맞서 핵무기를 사용하여 적의 진출을 막고
한반도 통일을 완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을 경계하며
허락하지 않고 맥아더 장군을 해임시켜 버립니다.
맥아더 장군은 미 의회 연설에서 유명한 말을 남기지요.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중공군 규모가 대략 26만 쯤이었다고
했는데 한창 전쟁을 빨리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UN군에게는 중공군 참전이 사기가 꺽이는 일이었습니다. 병력도 부족해 지고 무기도 부족해
지고 당시 중공군은 이미 국공내전과 일본군과의
전투로 단련이 된 정예군이었습니다. 결국 국군과
UN군은 철수를 결정하고 그후 휴전선 부근에서
고지전이 벌어지면서 휴전협상이 길게 이루어 집니다. 국군과 UN군은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협상하기
위해서 한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으려 노력했고
결국 지금의 휴전선이 형성됩니다. 여담으로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이 중공군의 참전을 요구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소련은 무기를 지원해
주었고요. 그리고 소련이 UN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미국을 한국전쟁에 끌어들여 그들의 전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고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중공군의 공격과 소련의 지원으로 인하여 국군과 UN군은 최선을 다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철수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병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요새 이런 역사는 안가르치나봅니다? 하기사... 6.25를 남한의 북침으로부터 출발했다는 황당한 이야기까지 돌고 있는 실정이니...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압록강국경까지 북진했다가 압도적인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된것이죠. 여기서 맥아더가 만주를 폭격하여 전황을 돌리자고 주장했으나, 당시 미국대통령 트루먼의 반대로 사령관지휘를 박탈당하게 되고, 결국 전쟁을 휴전하게 되어 현재의 휴전선이 생긴것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결론은 중공군 때문 입니다. 중공군이 2년9개월 동안 전쟁 이끌어중공군은 1950년 10월 19일 무렵에 압록강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어 당시로서는 세계 최강으로 꼽혔던 미군을 대상으로 집요한 싸움을 수행했습니다. 6·25의 중공군은 매우 탁월한 싸움 솜씨를 뽐냈다고 합니다. 전략에서도 밀리지 않았고,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미군이 주축을 이룬 16개 연합국의 군대를 넘어설 때가 많았다. 당시 한반도는 ‘현대’라는 타이틀을 걸고 사회주의 국가로 등장한 전통의 중국이 세계를 향해 처음 싸움 기술을 선보인 무대였고, 그들은 참전 초반부터 매우 경이로운 싸움의 방식을 자랑했고 950년 10월 말부터 그 해 12월 중순까지 벌어진 전투는 중공군의 일방적인 승리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압록강에 도달해 태극기와 유엔기를 꼽고 승리를 선언하려던 아군의 발길은 도중에 끊겼고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미군의 많은 병력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보다 허약했던 한국군은 2군단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참패에 직면했고 미군은 북진을 더이상 할수가 없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엔군과 우리군이 압록강까지 진출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이 달성되기 직전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밀리게 되었습니다.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우리군과 유엔군을 밀어붙였고 흥남철수도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전쟁은 대략 3.8선 부근에서 고착화되었습니다. 오랜 지지부진한 강화협정이 논의되었고 1953년 이승만 정부는 반대했지만, 북한군, 중공군과 유엔군 사이에 정전협정이 맺어졌고 정전체제가 오늘날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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