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푸른재규어247
푸른재규어24723.12.21

노량해전이 왜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였나요?

안녕하세요? 꽤 장시간 임진왜란이란 전투를 하였잖아요~ 그 전투속에 이순신장군도 꽤 많은 전투를 치뤘는데 왜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치룬 전투로 기록되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량해전은 정유재란 당시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이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운 전투입니다. 일본군의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다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출국했다가 휴전협상이 맞지 않아 1597년 15만 대군으로 조선에 정유재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조선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대첩에서 크게 승리하자 왜군은 보급로의 차단으로 엄청난 곤란을 격게 됩니다. 더군다나 1598월 8월 18일 토요토미의 죽음은 왜군을 더욱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왜군은 철수를 위해 순천 사천 울산 등으로 모여 퇴각하고자 합니다. 이순신과 명군은 순천에 있는 일본왜성을 공격하여 고니시 유카나와 부대를 고립시킵니다. 사천 고성 남해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들은 고니시부대를 구하기 위해 노량으로 향합니다. 사천의 시마스부대가 노량으로 올 것을 예측하고 공격하여 500여척 중 200척을 뷴파하고 150여척이 파손되어 패색이 짙어진 왜군은 150척으로 돌파를 시도하여 도주합니다. 뒤를 쫓던 이순신은 왜선으로부터 날아온 총탄에 맞고 쓰러져 죽게됩니다. 마지막전투인 이유입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량 해전(露梁海戰)은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이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운 전투입니다. 왜선 2백 여척이 부서지고 50여척을 도주했으나 100척은 관음포에서 탈출에 실패하고 배를 버리고 상륙 도주하여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이어집니다. 노량 해전으로 왜군이 퇴각하기 때문에 마지막 전투라 합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과 같은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

    본국으로 귀환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서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의 귀환을 막으려는 등 이에 노량해전이 발생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전투입니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다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철군하였다가 휴전 협상 조건이 서로 맞지 않아 결렬, 1597년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도독 유정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의 참전으로 남부 해상권이 조명 연합군에게 다시 넘어가게 되자,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사망하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조선 주둔 일본군의 수뇌부는 난관에 빠지게 된다.

    계속되는 패전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 저하되어 가고 있었고, 조선 수군에게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결국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하고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둘렀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공격한다. 이것이 순천 왜교성 전투이다. 6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운 조선 수군은 일단 고금도로 귀환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유키나가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사천 선진리성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치바나 시게토라, 남해에 주둔 중이던 소 요시토시 등은 고니시 군을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그러나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에 매복시켰다.

    이튿날인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수적 우세로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지만 오히려 퇴로가 막힌 관음포로 유인당해 일본 측이 포위공격을 당하게 된다. 이후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유키나가는 기회를 잡고 탈출을 시도했고 진린의 명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려 시도했고, 조명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다. 단 한명의 조선수군도 동요되어서는 아니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며,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초계군수 이언량 흥양현감 고득장 등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전사하였다. 이 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결국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 군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 군과 함께 일단 부산에 집결, 그 즉시 퇴각하였으며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입니다.

    육지에서는 남해왜성 소탕전이 있는데,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로 노량해전 이후 전개된 소탕 작전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