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루거우차오사건이 중일전쟁과 연관이 있나요? 자세한 내용 궁금합니다.
중일전쟁이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시작되어 2차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던데요. 중국의 루거우차오 사건이 중일전쟁과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자세한 내용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루커차우 사건은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 부근에 주둔한 군대는 국민혁명군 쑹저위안의 29군이었고, 일본군은 카니치로 타시로가 지휘하는 중국주둔군이었습니다. 양 군은 서로 루커차우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1937년 7월 7일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행방불명되었던 일본군병사는 20분 뒤에 부대로 복귀했으나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중국 주둔지역으로 일본군을 보내 수색하겠다고 요청하였고 중국군은 거절하게 됩니다. 일본군은 곧 전투태세에 들어가 다음날인 8일 새벽 중국군 진지에 포격을 시작하고 공격하여 루거우차오를 점령했습니다. 루커차우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전면적인 침략을 시작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7·7 사변(七七事变)은 1937년 7월 7일에 베이핑(현 베이징 시) 서남쪽 방향 루거우차오(루거우 다리盧溝橋, 병음: Lúgōuqiáo)에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벌어진 발포 사건으로,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7일 밤 10시 40분, 용왕묘(龍王廟) 방면에서 수 발의 총성이, 제방 방면에서 수십 발의 총성이 울리자 8중대장 시미즈 세쓰오(清水節郎, ? ~ ?) 대위는 즉각 병사들을 집결시켜 점호를 실시했는데 점호 결과 기병 척후병인 이등병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시미즈 대위는 이것을 중국군의 공격으로 간주하고 이치키 소좌에게 중국군의 선제공격으로 병사 1명이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올렸다고 합니다. 7월 8일 0시에 연대장 무타구치 렌야 대좌에게 병사가 실종되었다는 오보가 올라갔고 무타구치는 즉각 병력을 출동시키고 완핑현성에 주둔한 중국군과 교섭을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1937년 7월 7일에 베이핑(현 베이징 시) 서남쪽 방향 루거우차오(루거우 다리)에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벌어진 발포 사건으로,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은 전쟁 상태로 돌입, 그 후 전선을 확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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