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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까칠한호저17223.03.07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큰 기근은 언제였나요?

현대에야 굉장히 풍족하게 먹고 살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반도 긴 역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근은 언제로 기록되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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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07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경신대기근이 가장 큰 기근이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술·신해 대기근(庚戌辛亥大飢饉) 또는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은 조선 현종 11년(1670)과 12년(1671)에 걸쳐 발생한 대기근이다. 60갑자로 경신(庚申)년에 일어난 기근이 아니라, 기근이 경술(庚戌)년에서 신해(辛亥)년의 2년에 이르렀기 때문에 앞 글자를 따서 '경신(庚辛)대기근'이라 부른다.

    1670년 갑작스러운 흉작과 병충해로 인한 곡물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 강력한 태풍의 접근,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수도 한양을 비롯한 국토 전체에서 대량의 아사자와 병사자가 발생, 이듬해까지 지속되면서 행정이 마비될 정도의 국가적 위기가 도래한 사건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 이를 대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끔찍한 대기근을 겪은 결과로 양반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정치적 혼란도 심각해져 3년 뒤에는 서인과 남인이 충돌하는 2차 예송 논쟁이 발생하였다.

    조선의 역사가 500년이고 전·근대 사회에서 기근(飢饉)은 흔한 일이긴 했으나,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 때의 대기근은 대재앙, 대참사라는 단어도 부족할 정도였다. 이 2년 간의 조선은 "차라리 임진왜란 때가 더 나았다"는 이야기가 정사에까지 기록되어 있을 만큼 참혹했다.조선 팔도의 모든 백성들이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국적으로 기아에 시달려야 했으니 참혹함을 비교할 수가 없었다.

    출처: 나무위키 경신대기근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경술·신해 대기근(庚戌辛亥大飢饉)

    또는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은

    조선 현종 11년(1670)과 12년(1671)에 걸쳐 발생한 대기근이다.

    60갑자로 경신(庚申)년에 일어난

    기근이 아니라, 기근이

    경술(庚戌)년에서 신해(辛亥)년의

    2년에 이르렀기 때문에 앞 글자를 따서 '경신(庚辛)대기근'이라 부른다.

    -출처: 나무위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술, 신해 대기근 또는 경신대기근으로 조선 현종 11년과 12년에 걸쳐 발생했습니다.

    1670년 갑작스러운 흉작과 병충해로 인한 곡물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 강력한 태풍의 접근,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수도 한양을 비롯한 국토 전체에서 대량의 아사자와 병사자가 발생하고 이듬해까지 지속되면서 행정이 마비될 정도의 국가적 위기가 도래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 이를 대처하기 매우 어려웠고, 결과로 양반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정치적 혼란도 심해져 3년 뒤 서인과 남인이 충돌하는 2차 예송 논쟁까지 발생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기근은 1990년대 중반인 1994년경에 있었습니다. 이 기근은 북한 전역을 강타하여 수백만 명의 인구가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망자와 굶어 죽은 사람들이 발생했습니다. 이 기근은 북한의 경제 어려움과 자연재해, 농업 생산의 저조, 식량 배급 체제의 실패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근은 국제 사회의 지원과 남북한의 협력으로 극복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심한 기근은 아마도 경신 대기근(庚辛大飢饉)일 것 입니다. 이는 조선 현종 11년(1670년)과 12년(1671년)에 걸쳐 발생한 대기근입니다 .갑작스러운 흉작과 병충해로 인한 곡물 생산량 감소, 강력한 태풍의 접근,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 유행 등으로 수도 한양을 비롯한 국토 전체에서 대량의 아사자와 병사자가 발생, 이듬해까지 지속되면서 행정이 마비될 정도의 국가적 위기가 도래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 이를 대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끔찍한 대기근을 겪은 결과로 양반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정치적 혼란도 심각해져 3년 뒤에는 서인과 남인이 충돌하는 2차 예송 논쟁이 발생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