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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성큼걷는펭귄836
성큼성큼걷는펭귄83623.02.17

모네와 마네는 어떤관계였나요?

모네와 마네는 동시대사람이고 이름이 비슷하여 종종 헷갈리곤 하는데 활동하던 당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친분이 있던 관계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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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는 인상주의를 개척하며 알게 된 뒤로 평생을 가깝게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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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모네와 마네의 공통점은 전통적인

    미술을 거부한 점이다.

    두 사람이 활동하던 시대에 화가로

    성공하려면 파리 ‘살롱전’에서

    인정받아야 했다.

    하지만 인정받던 화풍은 정형화한

    틀에 맞추어 이상적인 모습으로

    꾸미는 것이었다.

    꾸민다는 것은 마치 디지털카메라로

    색감과 신체비율 등 원하는 모습으로

    꾸미는 것을 상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런 흐름에 맞서 모네와 마네는

    ‘보이는 대로’ 그리는 반 아카데미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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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크카 클로드 모네는 르아브르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고, 그곳에서 정식 미술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 후에 1859년에 피사로, 시슬레, 르누아르, 바지유 등의 화가들과도 친밀한 교류를 갖게 되는데, 이때 대선배인 마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네의 밝은 화풍에 끌려 환한 야외 광선 묘사에 주력해 마네를 중심으로 신예술 창조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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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네가 대선배입니다. 고향은 같고 이름까지 비슷하지요. 마네와 모네는 친구이자 동료이지만, 모네가 등단할 때 이미 마네는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고 있어 같이 이름불리는 것을 조금 불편해 했던 것 같습니다.

    마네의 대표작 올랭피아가 미국인 수집가에게 팔려가자 모네가 모금활동을 이끌어 되찾아온 사례가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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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상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는 인상주의를 개척하며 알게 된 뒤로 평생을 가깝게 지냈다. 모네와 마네의 공통점은 전통적인 미술을 거부했다. 두 사람이 활동하던 시대에 화가로 성공하려면 파리 '살롱전'에서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인정받던 화풍은 정형화된 틀에 맞추어 이상적인 모습으로 꾸며야 잘 팔리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모네와 마네는 '보이는 그대로' 화풍을 담아 그려내는 화가였기에 인기를 끌지 못했다.

    예로 1865년 마네가 '올랭피아'를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 심사위원들이 충격을 받았다. 이유는 모델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마네의 '풀받 위의 점심'(1863)에 영향을 받은 모네는 1874년 전시회를 열어 혹평을 받게 된다. 빛을 반영하여 그린 결과를 가지고 고전 기법과 다르다고 해서 '밑그림 같다' '그리다 만 것 같다' 등 혹평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프랑스 잡지 '르 샤리바리'의 기자 루이 르로이는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의 이름을 인용하여 전시회 모든 작품을 본질보다 이상을 그렸다고 조롱섞인 말로 기사화를 냈다. 그리하여 인상주의가 이렇게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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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에두아르 마네는 프랑스의 화가로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며 세련된 도시적 감각의 소유자로 종래의 어두운 화면에서 밝음을 도입하는 등 전통과 혁신을 연결하는 중개역을 수행했습니다.

    클로드 모네는 햇빛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 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한 인물입니다.

    이름이 비슷한 만큼 두 사람의 우정은 돈독했고 서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마네는 모네보다 8살이 많지만 모두 동시대를 풍미한 프랑스의 대표화가로 부유한 집안 출신 마네는 한 스승 아래 6년이상 배우고 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좋은 조건에서 화가가 되었고, 가난한 상인의 아들 모네는 스스로 회화를 익히며 역경을 해텨나가는 줄리한 조건에서 화가가 되었습니다.

    마네는 일찍이 국전에 입선하고 언론을 통해 문인들의 호평과 악평을 동시에 받아 작품을 비싸게 팔수 있었는데 모네는 마네를 존경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그의 그림을 모작하였습니다.

    마네는 올랭피아의 악평 후 실제적인 인상파의 산실이 되는 바티뇰 불바드에 있는 게르부아에 화실을 열었고 젊은 화가들은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새로운 회화 경향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데, 모네, 세잔, 르누아르, 바지우, 팡탱-라투르,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 온 휘슬러 등이 자주 모인 이 카페 가까운곳에 마네의 아파트가 있었고

    마네는 그곳에서 자신의 피아노 선생이며 연상의 네덜란드 여인 수잔과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인 화가들은 동네 이름을 따 바티뇰 그룹, 마네파 로 불렀는데 모네와 마네가 만난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첫만남은 좋지 않았습니다, 1866년 모네는 첫번째 아내 카미유를 그린 녹색옷을 입은 여인, 카미유로 큰 호평을 받으나 모네의 그림을 사람들이 마네의 그림으로 착각하여 마네에게 찬사를 보내 마네는 불쾌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관객들 사이 모네가 끼어있어 마네는 더 화가 났고, 그날 모네는 전시장을 돌다 우연히 마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에게 사과를 할수도, 아는척을 할수도 없었습니다.

    모네는 그 당시에도 마네를 존경하고 있어 쉽게 말을 걸수 없었습니다.

    그 둘은 다음해 오베르가의 화랑 앞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는데 두사람은 정식 인사를 나누고 친구가 된것은 첫 만남으로부터 3년이 지난 1869년 바티뇰의 한 카페였습니다.

    서먹한 사이로 시작되었으나 두 사람은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었고, 마네는 젊은 친구의 재능과 그의 실험정신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모네는 그런 마네를 선배로 의지했습니다.

    1874년이후부터 마네와 모네의 우정은 돈독해졌고 마네는 모네와 함께 센 강둑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자연광선으로 조명된 뱃놀이 라는 그림은 마네의 작품 가운데 가장 밝은 그림이며 햇빛을 받은 배 안에 앉아있는 광경을 그렸습니다.

    모네가 낡은 배안에서 아내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 담겨져있어 모네 가족의 단란한 한때를 담은 마네의 작품으로 당시 두 화가의 긴밀했던 우정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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