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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5.17

합스부르크 가는 왜 계속 근친혼을 고집한 것입니까

합스부르크가 무는 신성로마제국의 통치 가문으로서 상당한 영광을 누렸는데요 왜 그들은 계속해서 친족 간의 근친혼을 유지하여 유전병으로 고생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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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7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근친혼을 통해 명문을 유지하려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바로 그러한 정략 때문에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명문 가문의 유전자가 세월과 함께 병들기 시작했고 후손들은 이를 감내해야만 했다.

    사실 왕가의 근친결혼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만 성행한 것은 아니다. 당시만 해도 유럽의 대부분의 가문들은 정략결혼으로 근친혼을 택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근친(近親)의 정도가 멀었다. 반면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은 너무 가까웠다. 6촌 이내 결혼이 상당히 많았고 심지어 3촌과 조카 사이에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근친혼으로 명맥을 이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병약해서 빨리 죽었고 유아 사망률도 매우 높았다.

    당시만 해도 각종 질병과 영양실조에 노출돼 있는 보통 스페인 어린이들 가운데 20%가 10세 전 사망한 데 비해, 합스부르크가 어린이들은 좋은 환경 속에서도 절반 가량이 10세를 넘기지 못했다.

    결국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200년 만에 카를로스(Charles) 2세의 죽음과 함께 맥이 끊겼다. 이후 피 비린내 나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브르봉 왕가로 바통이 넘어갔다는 이야기는 이미 설명한 내용이다.

    특히 근친혼은 스페인에서 더 심했다. 다시 말해서 친척도 먼 친척이 아니라 너무나 가까운 친척이었다.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의 아버지는 펠리페 4세, 어머니는 마리아나로 사실상 삼촌과 조카 사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근친혼으로 인한 왕가의 병색(病色)이 바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누적된 결과가 폭발한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카를로스 2세는 병이 잦았고, 지체장애에다 정신까지 박약했다. 더구나 큰 문제는 자녀를 갖지 못했다.

    출처: 중앙일보 오피니언 e칼럼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은 근친혼의 業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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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카를 5세부터 시작된 스페인 합스부르크는 다른 왕조들처럼 혁명이나 외부 침입으로 단절된게 아니라 수백년간 반복된 근친혼으로 무너졌습니다.

    이 가문은 결혼을 통해 동맹을 다져서 전쟁을 피하는 방식으로 가문을 번영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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