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말로 사치스러운 사람이었나요?
프랑스 혁명을 이끈 쪽에서는 그렇게 묘사하고는 하지만 정말 실제 역사에서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은 것 같아요(먹을 게 없다면 빵을 먹으라는 말도 실제 한 적이 없다는 말도 있어요). 혹시 아신다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사적으로 실제 어떤 인생을 살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제로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루머에 시달린 것으로 보입니다.
1774년, 루이 15세가 천연두에 걸렸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함으로써, 그녀의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마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비록 왕비가 되었으나 프랑스인들은 그녀에 대해 냉담한 편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는 오랜 기간동안 적대관계에 있었기에 국민적 감정의 골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정악화의 원인이 궁정의 사치, 특히 왕비의 사치 때문이라는 인식이 높았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목걸이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1785년에는 부르봉 왕가의 치세 말기를 상징하는 스캔들인 목걸이 사건이 발생하며 그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은 한층 더 가중됐습니다. 사건의 개요는 주범인 라모트 백작부인이 로앙 추기경에게 접근하여 왕비가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국왕 모르게 타인 명의로 구입하기를 원한다고 속여서 대리구매를 하도록 유도한후 중간에서 가로챈 전형적인 사기사건이었습니다. 사건의 전모는 재판을 통해 사기극으로 밝혀지고 왕비는 결백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왕비의 체면과 위신은 크게 떨어져 버렸습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음에도 파리 시민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두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생각했습니다. 목걸이 사건은 그녀를 향한 증오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와중, 궁정 내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의 염문이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폴리냑 백작 부인 등 자신이 마음에 드는 소수의 귀족들 만을 극단적으로 총애 했고 그로 인해 그녀의 그룹에 끼지 못한 귀족들은 그녀와 총신들을 향해 매일같이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베르사유 외의 다른 장소, 특히 파리에서는 이러한 정세가 심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루이 16세의 왕비입니다. 오스트리아와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루이 16세와 정략 결혼하였으나 38살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마리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들이 많았지만 상당 부분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왕비로 있을 때 국고가 바닥난 것은 그녀의 사치때문이 아니라 선대의 향락과 미국 독립 전쟁 지원 때문이었고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사치와 향락의 궁전으로 알려진 쁘띠 트리아농 궁에서 실제는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겼습니다.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또한 루이 15세의 애첩의 것이고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드세요라는 말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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