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신량역천에 대한 인식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 뱃사공 백정 수군 봉수군 역졸들을 신량역천이라고 했다는데 이 말이 어떻게 나왔으며 이들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실제로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량역천. 말 그대로 신분은 양인이지만 수행하는 역은 천역(賤役)인 사람들이다.
신량역천 계층은 과거에 응시하여 관료가 될 수 없었다. 일반 양인들은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거나 혼인, 혈연관계 등을 통해 본인의 국역을 바꾸는 것이 제한적이나마 가능하였으나 이들은 그것이 불가능하였다. 오히려 이들 계층이 다른 양인과 혼인하면 혼인한 양인도 신량역천 계층으로 편입되도록 법규가 정해져 있었다.
-출처:우리역사넷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들의 신분은 양인이었지만 누구나기피하는 고된 역에 종사했으므로 양인과 천인 중간 계층으로 취급되어 이러한 호칭이 되었습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된 뒤 사회문제로 등장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양천의 분간이라는 문제로, 본래 양인이었던 자가 고려말 사회적 혼란기에 압량, 투속 등의 방법으로 천인이 된 자가 많았으나 1361년 홍건적의 개경 점령 때 호적이 산실되어 이들에 대한 본래 신분을 판별하는 것이 어려웠고, 국가는 양천 신분이 분명하지 않을 때 양인 신분을 인정하면서 그들을 특수한 직임에 충당시켰는데 사재감수군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이들이 맡은 직임이 고되었으므로 천시되었고 수군은 신량역천이라는 한 계층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량역천은 양인 신분이면서 천역에 종사하던 부류를 말합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된 뒤 사회 문제로 등장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양천의 분간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본래 양인 신분이었던 자가 고려 말 사회적 혼란기에 압량(壓良)·투속(投屬) 등의 방법으로 천인이 된 자가 많았다. 그러나 1361년 (공민왕 10) 홍건적의 개경 점령 때 호적이 산실되어 이들에 대한 본래 신분을 판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국가는 양천 신분이 분명하지 않을 때 양인 신분을 인정하면서 그들을 특수한 직임에 충당시켰는데 사재감수군(司宰監水軍)이 그 대표적 예이다. 그런데 이들이 맡은 직임이 몹시 고되었으므로 천시되었고 이후 수군은 마침내 신량역천이라는 한 계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 밖에도 중앙 관서 및 종친·관리들에게 배속되어 수종(隨從)·호위·사령 등 잡역에 종사하는 조례(皂隷), 중앙의 사정 및 형사 업무를 맡은 관서에 소속되어 경찰·순라·옥지기 등 잡역에 종사하는 나장(羅將), 지방의 각 읍이나 역에 소속되어 사객(舍客)의 지대를 맡았던 일수(日守), 조운에 종사하는 조졸(漕卒), 봉수대 위에서 기거하며 후망과 봉수 업무를 수행하는 봉수군, 역에 소속되어 역역(驛役)을 세습적으로 부담하는 역졸(驛卒) 등도 신분은 분명히 양인이었지만 신량역천으로 되어『속대전』에 칠반천역으로 규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량역천 [身良役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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