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은병은 무엇이며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가요?
고려시대 를 공부하다보면 은병이란 용어가 나오던데 도무지 무엇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고려시대 은병은 무엇이며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은병은 화폐의 기능과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삼한중보, 동국통보, 해동통보와 같은 여러 가지 종류의 동전이 만들어져 유통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왕권강화와 상업진흥을 도모하던 숙종대에는 화폐에 대하여 적극적인 정책을 채택하여 숙종 7년(1102)에는 해동통보 1만 5천 개를 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은 1근으로 만든 은병은 동전 혹은 철전의 일반화폐에 비하여 고액화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숙종 6년(1101) 법정화폐로서 처음 제작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은병은 고려시대에 사용되었던 고액 화폐 였습니다. 은병은 대각 국사의천이 쌀과 포를 대신하여 유통시킬 화폐를 제작할 것을 제안하면서 만들어진 화폐인데요. 하지만 당시 은병의 원재료였던 은의 가격이 높았었기에 원래 의도와 다르게 민간에서 교환수단으로 널리 활용되지는 옷했습니다. 이후 은병은 고액권으로 이용되었으며 추후 해동통보와 같은 동전은 소액권으로 함께 유통되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은병은 고려시대의 은화 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삼한중보, 동국통보, 해동통보와 같은 여러가지 종류의 동전이 만들어져 유통되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왕권강화와 상업진흥을 도모하던 숙종대에 화폐에 대해 적극적인 정책을 채택하여 숙종 7년에 해동통보 1만 5천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은 1근으로 만든 은병은 동전 혹은 철전의 일반화폐에 비해 고액화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숙종 6년 법정화폐로서 처음 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삼한중보, 동국통보, 해동통보와 같은 여러가지 종류의 동전이 있었습니다. 은병은 은 1근으로 만든 고액 화폐로 숙종 6년에 법정화폐로 처음 제작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은병은 고려 시대 고가의 화폐 였습니다. 숙종은 1097년(숙종 2) 주전관(鑄錢官)과 뒤이어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하였고 그 뒤 1101년에는 은병을 주조해 유통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은병은 은(銀) 1근으로 우리 나라의 지형, 즉 반도 모양의 병(甁) 양식을 본떠 만들었다고 합니다.일반에서는 이를 활구(闊口)라고도 하였는데 그것은 병의 구멍은 작은 것이 보통이나 은병은 위가 넓었기 때문에 그렇게 칭한 것 같습니다. 은병 한 개의 교환 가치는 일정하지 않았는데 때로는 쌀 10석(石), 또는 15·16석, 18·19석, 20석, 40석, 50석에 해당하였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뭐 한국의 화폐사용은 조선 숙종 때 보편화 되기 시작하는 상평통보가 사실상은 처음이나 같아서 그 전의 화폐는 많이들 만들기는 했지만, 실사용은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조금 사용된 것이 은병인데요. 은병도 일상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고, 대규모 거래에서 더러 사용되기도 했던 정도라고 하네요.그리고 은병도 공식적인 화폐로 발행을 한 것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삼한중보, 동국통보, 해동통보와 같은 여러 가지 종류의 동전이 만들어져 유통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왕권강화와 상업진흥을 도모하던 숙종대에는 화폐에 대하여 적극적인 정책을 채택하여 숙종 7년(1102)에는 해동통보 1만 5천 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은 1근으로 만든 은병은 동전 혹은 철전의 일반화폐에 비하여 고액화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숙종 6년(1101) 법정화폐로서 처음 제작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은병 [銀甁]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겉모습만 보면 화폐인지 물병인지 모를 정도로 재미난 형태의 화폐이다. 고려 숙종 때인 1101년에 발행된 것으로 은병(銀甁)의 독특한 형태는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뜬 것이다. 은병의 형태에서 당시 민족의식이 무척 고무되어 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은병은 은 1근의 무게를 기준으로 하였고, 윗부분의 입구가 컸기 때문에 활구(闊口)라고도 불렸다. 은병의 발행에는 당시의 학승(學僧) 대각국사 의천의 의견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의천은 송나라에 가서 주화의 편의성과 효율성을 체험하고 돌아와 주화의 유통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고 한다.
초기 은병 1개의 가치는 포목 100필에 해당하는 고액이었기 때문에 주로 국제간의 큰 거래와 고관, 귀족 및 지주 등의 상류사회에서만 유통되었다. 또한 국가가 은병의 순도와 중량을 보증한다는 표인을 찍어 나라의 법화임을 증명하였다고 하지만, 현품이 전하지 않아 확인할 길은 없다.
은병이 발행된 지 4년 후에는 은병의 원료인 은의 조달이 어려워져 동을 섞어 만든 위조 은병이 성행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은병의 위조가 성행하자 최초 은병이 나타난 지 230년이 지난 1331년(충혜왕 1년)에 소은병을 제작하여 사용하였으며, 소은병이 발행됨과 동시에 이전의 은병은 사용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시일이 지나면서 은병인지 동병인지 모를 정도로 동의 함유량이 많은 조악한 소은병이 나돌아 고려 말에 이르러 유통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한편 일부 지방에서는 조선 초기까지 소은병이 유통되었는데, 1408년(태종 8년)에 금령이 반포되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출처 : 한국의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