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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6

고려시대 병마사와 도병마사는 어떻게 다른것인가요?

고려시대 병마사와 도병마사는 어떻게 다른것인가요? 고려시대 군사조직과 관련된 용어였다는것은 알겠는데 두 용어가 비슷해서 헷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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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병마사는 고려시대의 국방회의기구.

    국가의 군기(軍機) 및 국방상 중요한 일을 의정(議政)하던 합의기관(合議機關)입니다. 도병마사가 설치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며 1011년(현종 2)에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를 임명한 기록이 처음 나오므로 현종 초에는 도병마사가 설치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로 따지면 국방부라고 보시면 될거같아요.

    그리고 병마사는 당시 양계 지역을 다루는 직위이지만 도병마사는 그 범위가 도까지 확장된 것으로 병마사보다 더 상위개념인것입니다

    출처 - 지식백과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6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마사는 고려시대 지방 조직인 양계에 파견한 지방 관리로 고려시대 행정조직은 5도와 양계로 구성된 2원적 행정조직이며 5도는 행정적 조직으로 안찰사를 파견, 양계는 군사적 조직으로 병마사를 파견했습니다.

    도병마사는 고려시대의 국방회의기구로 국가의 군기 및 국방상 중요한 일을 의정하던 합의 기관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계 "병마사"는 989년 처음 설치되었으며, 군사적 기능과 민사적 기능을 포괄하여 담당하였습니다. 봄⋅가을로 교대하는 6개월 임기제였습니다. 양계 병마사가 민사적 역할까지 겸임한 것과 달리 군사적 목적에 따라 임시로 설치한 병마사도 있었습니다.

    유사시 재상이 겸임하는 행영 병마사, 추가로 파견된 부대의 지휘관인 가발 병마사 등이 이에 속했으며, 전투 중에 중앙군을 동원하기 위해 조직된 5군(五軍)의 지휘관인 중⋅전⋅후⋅좌⋅우군 병마사도 특별한 시기에 특정 목적으로 설치한 병마사였습니다.


    양계 병마사는 몽골 침입기를 지나 양계 지역이 원(元)에 거의 귀속되면서 사라졌다가, 이들 지역이 수복된 이후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말에는 양계 지역에 여러 관리가 자주 파견되면서 민사적 역할이 줄어들었고, 1390년(공양왕 2) 전국에 도관찰출척사를 파견하면서 양계의 장관으로서의 병마사제는 사실상 소멸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군 지휘관 격인 병마사는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더 자주 임명되었습니다.



    "도병마사"는 일반적으로 989년(성종 8)에 설치된 동서북면병마사의 판사제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병마 판사제는 동서북면에 병마사 등을 파견하여 방위 임무를 맡기고, 중앙에서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문하시중 등의 고위 관원을 판사로 삼았던 제도였습니다. 도병마사에 대한 기록은 1015년(현종 6)에 처음 확인되므로, 그 이전에 제도적으로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병마사의 고위 임원은 양부로 통칭되는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에서 충당되었습니다. 먼저 도병마사의 최고직인 판사는 최고 정무 기관인 중서문하성의 다섯 재신(宰臣)이 겸하였습니다. 여기에 6명의 중추원 추밀(樞密)이 사로 임명되었으므로, 도병마사의 상층부를 이루는 이들 고위 관원을 ‘재추(宰樞)’로 통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외에 정4품 이상 시랑 등의 관원 중에서 부사가 임명되었으며, 종4품 소경 이하 관원에서 판관이 임명되었습니다. 판관 이상의 관료들은 논의해야 할 사항이 있을 때 도병마사에 모여 정책을 심의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양계(兩界) 지역의 군사 문제를 주로 다루었으나, 점차 국가적인 주요 사무 전반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170년(의종 24) 무신 정변 이후에는 중방(重房) 등이 도병마사의 기능을 대신하면서 그 역할이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고종 말엽에 이르면 도당이라 칭하면서 원래의 부사와 판관은 없어지고,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추밀원의 추밀만이 모여 회의하는 기구가 되었으며, 국방 문제뿐만 아니라 국사 전반에 걸친 주요 의제로 논의 대상이 확장되었습니다.

    1279년(충렬왕 5) 도평의사사로 개칭되면서 참여하는 재신, 추밀의 숫자가 늘어나고 기능이 더욱 확대되었으며, 조선 초 의정부로 개편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전신이다. 기원은 989년(성종 8)에 설치된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의 판사제(判事制)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서북면과 동북면에 파견된 병마사를 중앙에서 지휘하기 위해 문하시중·중서령·상서령을 판사로 삼았는데, 이 병마판사제가 뒤의 도병마사의 모체가 된 것 같다.


    그 뒤 1015년(현종 6) ‘도병마사주(都兵馬使奏)’라는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보면 현종 초에는 도병마사제의 기구가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마사> 병마한테 고려시대 양계 지역에 파견되어 군사와 민사 행정을 총괄하던 지방 장관 입니다. 989년 성종(8)에 설치 되었으며 양계에는 각각 안북대도호부와 안변도호부를 두었고 그 밑에 방어주와 진이 설치 되었습니다.’

    도병마사 > 고려시대의 국방회의기구

    국가의 군기 및 국방상 중요한 일을 의정하던 합의기관 입니다. 도병마사가 설치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며 1011년(현종2)에 도명마녹사를 임명한 기록이 처음 나오므로 현종 초에는 도병마사가 설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병마사는 국방문제를 담당하던 기구고

    파견되는 것은 병마사라고 보면 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