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가 한국 영역이었던 역사가 있나요?
대마도는 한일 양국에서 이득을 취하는 모습을 역사내내 보여주는데 대마도가 일본이 아닌 한반도내에 있는 국가의 영역이었던 적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기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488년 당시 명나라 사신이었던 동월이 영조의 명을 받아 조선 땅을 둘러본 뒤 작성한 견문록 ‘조선부’에 나와 있는 ‘조선팔도총도'라는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기돼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마도가 조선 땅이었음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엄연히 나와 있다고 합니다. 조선이 형편없이 깨진 임진왜란 당시에도 대마도는 조선 땅이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대마도 동편의 바다를 조선해(朝鮮海)로 불렀고, 일본 또한 그리 불렀다고 합니다. 그랬지만 구한말 고종 시대에 완전히 바뀌어 버렸는데 일본은 강화도조약 직후인 1877년 ‘대마번’을 나가사키현에 편입시켰다고 합니다. 대마도주에게 백작 벼슬이라는 당근을 주고 아예 일본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대마도가 지방 호족의 개인 소유지가 아니라 일본의 국유지가 된 것 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세종 원년(1419) 6월 19일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己亥東征) 이에 따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병선 227척과 장병 1만 7,358명을 인솔해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의 천해만과 오자키·후나고시·진나를 공격했다.
대마도에 상륙한 이종무 군은 적선 129척을 나포하고 왜구가 사는 집 1939호를 불질러 태워버렸다. 생포한 왜구는 12명이었고 참수(斬首)한 왜구는 114명이었다. 내친 김에 이종무 군은 왜구들이 심어 놓은 곡식을 베어버려 요행이 산 속으로 도망친 자들도 굶게 만들었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후 대마도는 경상도 동래부의 소속도서로서 편입되어 조선정부의 통치에 임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 열도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부산에서 약 50km의 거리에 있어 한국과 관계가 깊었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다. 1274년 1281년 두 차례 몽골군 일본 본토 정벌을 위해 대마도에 상륙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마도를 근거지로 조선의 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의 폐해가 막심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하였고 굶주린 왜구들에게 쌀을 제공하는 회유책과 벼슬을 하사하는 귀화정책 등의 정책을 구사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되자 세종 때에는 이종무(李從茂)가 200척의 군선을 이끌고 대마도 원정(遠征)에 나선 바 있다.
대마도의 지명은 고려와 조선의 영향을 받은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즈하라에 있는 시라기야마(新羅山)와 북섬에 있는 고마야마(高麗山)이 그 예가 된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쓰시마도주(島主)는 소 요시토시(宗義智)였으며 그의 장인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선발대로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이후 대마도 번주 소우지[宗氏]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염포·제포)를 개항하자, 쓰시마는 에도[江戶]시대 말기까지 대(對)조선무역이 활발했다. 1906년 구한말에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애국지사 최익현이 볼모로 잡혀와 사망한 곳이며 그를 추모하는 비석이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즈하라 가네이시성(金石城) 유적지에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가 대마도 도주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며 두사람의 결혼을 기념하는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쓰시마의 중심지역인 이즈하라는 13세기 중엽 이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쓰시마를 지배해온 소씨[宗氏] 일족의 거성(居城)이 있던 곳으로 성터와 소 요시토시를 기리는 반쇼인(萬松院)등이 남아 있다.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대마도를 거쳐가기 때문에 사절단 일행이 머물렀던 유적이 남아있으며 숙박지였던 세이산지(西山寺)가 있다. 또한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高麗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부근에 대마도 민속자료관과 향토사료관이 있다. 그리고 조선 초 통신사로 대마도에 건너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한 이예(李藝)의 공적비가 대마도 미네초(峰町)에 소재한 엔추지(圓通寺)라는 사찰에 세워졌다. 그리고 신라국사 박제상공 순국비(新羅國使朴堤上公殉國碑)가 있다. 그는 볼모로 잡혀간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되었다. 1703년에는 위문행역관사(慰問行譯官使)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사 한천석(韓天錫)과 부사 박세양(朴世亮) 등 113명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그들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한국전망대에 세워져 있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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