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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5

하멜이 조선에서 겪은일이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하멜은 어느 왕때 조선에 들어왔나요?

그리고 훈련도감에 소속 되었는 걸로 아는데

무슨 일로 훈련도감을 탈출하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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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1개의 답변이 있어요!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5.05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큄(Gorcum)이라는 도시에서 출생하였다. 호르큄은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라인강의 지류인 왈강이 네덜란드 운하와 연결되어 있어 곡물을 운반하는 선박의 왕래가 잦았으며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하멜의 가족은 대대로 호르큄에서 살았다. 16세기 네덜란드는 해외무역이 발달하면서 중국, 일본,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에 걸쳐 해상무역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해상무역을 배경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헨드릭 하멜은 165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취업하였고 선박의 포수(砲手)로 바타비아(Batavia:현재의 자카르타)에 건너갔다. 당시 바타비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사가 있었으며 동양의 향신료와 중국과 일본의 청화백자를 가져다가 유럽에 되팔아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하멜은 이곳에서 근무하며 서기(書記)가 되었다.



    1653년(효종 4) 7월 하멜은 상선 스페르웨르(Sperwer) 호를 타고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게 되었는데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漂着)하였다. 당시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은 하멜 일행을 체포하여 감금하였고 당시 네덜란드 출신으로 조선에 귀화한 박연(朴燕, 네덜란드 이름 얀 얀스 벨테브레 Jan Janse Weltevree)이 한양에서 내려와 통역을 하였고 하멜 일행의 소속과 정체가 파악되었다. 하멜 일행은 제주도에서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10개월 동안 감금되었다가 이듬해 한양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하멜은 조선의 임금인 효종을 알현하였는데 이때 일본으로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으며 자신이 포를 다루는 포수의 경험 때문에 신무기 개발을 지원하는 훈련도감에 배속되었다. 당시 조선은 북벌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문물과 지식이 무기개발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자 하멜은 이들을 찾아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가 이런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1656년 3월 한양 훈련도감에서 이들을 담당하기가 힘겨워지자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어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에 소속되었다. 이곳에서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잡역에 종사하였다. 당시 흉년으로 생활은 궁핍하여 먹을거리를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1660년에 전라병영에 부임한 절도사 구문치는 하멜 일행에게 비교적 관대하여 이들에게 집과 텃밭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7년 동안 전라병영성 근처 초가집에 머물렀다. 1663년(현종 4) 흉년이 들자 하멜의 일행은 남원에 5명, 순천에 5명, 여수(麗水)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12명이 분산되어 배치되었다. 하멜은 여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었고 고된 노역과 생활고에 지쳐 탈출을 결심하였다. 1666년(현종 7) 마침내 7명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하여 일본 히라도(平戶)로 건너가서 나가사키(長崎)로 탈출하였다.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 바쿠후에도 전해져 조선에 남아있는 네덜란드 선원들의 석방교섭이 진행되었다. 1667년 석방 교섭이 완료되어 조선에 남아있던 동료도 모두 석방되었고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조국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은 그해에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 국내에서는《하멜표류기(漂流記)》로 알려진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억류생활 14년간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하멜 표류보고서》는 자신과 동료가 조선에 억류되어 14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가 출판되자 네덜란드와 유럽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이 유럽에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 직접 교역을 위해 1000톤 급의 선박인 코레아 호를 건조하였으나 일본 바쿠후의 반대로 코레아 호는 조선으로 항해하지는 못했다. 하멜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1692년 2월 12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