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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12.12

경제 대공황이 일어난 배경은?

안녕하세요? 1929년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제 대공황은 정말 일자리가 없어지고 다들 힘들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경제대공황이 촉발된 원인은 무엇이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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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1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0년대 호황기를 누리던 세계경제가 거품이 꺼진 192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부터 실물 경기 하락을 맞이하고 1929년 9월 20일 영국 최대의 투자자, 기업인, 금융인이었던 클래런스 찰스 해트리 및 그의 동료 수 명이 사기 및 위조죄로 투옥되어 런던 증시가 대폭락했다는 소식이 미국의 해외 시장 투자에 대한 낙관론을 악화시켰고 그 해 10월 해트리그룹의 파산이 법원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어서 약 2,400만 파운드의 가치로 1929년 월스트리트 폭락에 기여하여 1929년 10월 24일과 10월 29일 미국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급작스럽게 폭락하면서 그 여파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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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쟁의 역사로 치닫는 암울한 시기는, 1929년 미국의 윌 스트리트에서 불어온 대공황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공황은 전 세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일본의 피해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컸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0여 년간 한 번도 호황이 없었다. 게다가 대공황이 일어나기 2년 전에는 금융 공황까지 일어났다. 이에 정부는 경제 재건을 위해 철저한 긴축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그 여파로 일본의 거의 모든 산업계가 몸살을 앓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세계 대공황의 쓰나미(津波)가 일본에 몰아닥친 것이다.

    대공황이 일어나기 직전, 1920년대는 일본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시기였다. 1928년 처음으로 25세 이상 남자라면 누구나 참여하는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대공황 당시 일본 정부는 보통선거로 선출된 다수당에 의해 내각을 결성했다. 이제 일본도 본격적인 정당 정부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일본의 민주화는 막 첫발을 뗀 상태였다. 그래서 대공황의 거대한 위기 앞에서 정당 정부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정부는 대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만으로 급한 불을 끄려는 식의 미봉책을 취했다. 게다가 여전히 자본가와 대기업에 특혜를 주고 정치 자금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미숙한 정당 정부는 대공황의 파산위기에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인간은 악취를 풍기는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그대로는 살 수 없다. 어떤 희망, 거짓일지라도 희망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이때 일본의 국가주의가 가공 희망을 앞세워 위기의 토양에 급속히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희망이란 건 바로 전쟁이었다. 국가주의는 현실의 모순을 증폭하고 진실을 호도하여 전쟁을 옹호했다. 그들의 시도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공황의 위기에서 본격화된 국가주의는 태평양전쟁까지 하나의 연결체로서 결합되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일본에서 '학계의 천황'이라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 권위를 얻은 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는 패전 직후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과거 서양의 생활양식을 재빨리 흡수하고 서구의 전통에 밝았던 지식인들조차도 그토록 파멸적인 전쟁 속으로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질질 끌려갔을까? 아니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일본 국가주의가 가장 전면에 내세우는 상징과 명분은 천황이었다. 그들은 이를 '국체'라 표현했다. 즉 '신성불가침한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국'이었다. 국체, 즉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 국가는 1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절대적인 권위 그 자체였다. 일본에서는 국체를 넘어서는 다른 어떤 종교적 · 도덕적 가치도 없었다. 국체는 위기에 선 일본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익청년에 의해 저격당한 하마구치 수상.

    일본의 국가주의자들은 "정치가, 자본가, 대지주 등 지배 계급이 자기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국가적 위기가 왔다"고 비난했다. 대표적인 국가주의 사상가 기타 이키(北一輝)는 고도로 집권화된 국가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전체가 하나로 되는 사회, 즉 계급 갈등이 없고 천황의 직접 지배 아래 아시아의 7억 형제들을 서양 열강의 식민지 굴레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통일된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국가주의는 국민들에게 천황에 대한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며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동조자를 찾아 모았다. 특히 국가주의 사상은 총력전을 위해 새로운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믿고 있던 장교들 속으로 강력하게 파고들었다.

    국가주의자들은 폭력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1930년 11월 광신적인 우익 청년은 런던 해군군축조약에 항의하여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총리를 저격했다. 1931년 3월과 10월에는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었다. 즉 일부 장교들이 정당 정부를 몰아내고 군부 정권을 수립하려는 쿠데타였다. 경제대공황의 여파가 닥치면서 일본사회는 합법적인 틀 안에서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채, 폭력행동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외국 기자는 당시의 일본 정치를 '암살에 의한 정치'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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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국 경제 대공황의 이유는 1920년대의 경제 과열과 주식시장에 대한 과도한 투자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가상화된 경제의 증폭을 초래, 결국 시장의 붕괴로 이어졌는데 또한, 금리 조정의 실패, 은행의 대량 폐업, 농산물 가격의 급락 등도 대공황의 주요 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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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제대공황과 같은 경우에는 현재까지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과잉생산과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국제통화기금 등의 부재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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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으로 1920년에는 침체에서 벗어났습니다. 특히 전쟁에서 피해가 덜한 미국이 1923년부터 1929까지 상승 국면으로 접어들어 세계 경제를 주도하였습니다. 미국의 호황과 대외 투자를 배경으로 세계 경제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영원한 번영’을 꿈꾸며 주식 투기가 전개되면서 자동차·가전·건축·철강 등의 산업 분야에서 과잉 생산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미국은 호황이지만 구조적 실업과 더불어 농업·방적업·피혁·석탄·조선 등의 산업이 불황이었고, 소비와 수요의 확대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과잉 생산은 재고 확대, 생산 축소, 기업 도산과 실업 등으로 이어져 주가 변동을 초래하였습니다.

    1929년 9월부터 미국에서 주가가 폭락해, 10월 24일 뉴욕 월스트리트 증권거래소가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주식이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진 ‘암흑의 목요일(Black Thursday)’이었다. 이후 위기감이 증폭되며 주가가 2개월 만에 40% 이상 급락했고, 공업은 물론 농업과 금융 등 경제 전반이 위축되었으며, 전세계로 파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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