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에도 내시가 있었습니다
- 고려의 내시는 내료라고 불렀으며 내료는 액정국에 소속되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거세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에는 세도가의 자제출신인 근시문무관들이 소속된 내시원이 정무와 관련된 일을 했으나, 대령후 사건 이후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거치면서 액정국 내료인 환관이 맡게 되었다. 이 영향으로 조선건국 후 액정국이 내시부로 바뀌었다. 이후 세종27년(1466) 왕의 근시문무관이 소속 된 내시원이 내직원으로 바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내시는 궁궐 내의 여인들을 넘보지 않도록 내시가 되기 위해서는 성기를 제거해야 했다(→환관). 조선 시대의 내시부에는 140명의 내시가 있었는데, 이들은 궁중내 살림을 맡아보았으며 최고위직인 상선, 즉 판내시부사의 경우 임금을 옆에서 모시는 중요한 일을 하였다. 또한 결혼을 하거나 양자를 두어 대를 이을 수 있었고, 족보도 만들었다. 한국방송공사 역사 다큐멘터리 《한국사 전》왕의 남자, 내시 김처선 편(2007년 9월 22일)에 의하면 내시들은 시험을 주기적으로 보았으므로 실력을 갖추어야 했다.
조선은 중국과 달리 환관들이 결혼하고 입양을 통해 아이를 두는 등 가정을 이룰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환관들이 부와 권력대신에 가정에 몰두할 수 있게 해서 환관이 권력화되는 폐단을 어느 정도 줄일수 있었고, 또 환관들도 지킬 가정이 있으니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환관은 음경까지 절단하는게 아니라 고환을 제거해서 생식능력만 없애는 것이였다. 그래서 성생활 자체는 가능했다고 한다.
갑신정변때 폐지되었으나, 3일만에 끝나 다시 부활되었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