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는 실권자가의 옆에서 부리는 시종 의미를 지녔으며 중국에서는 정식 관직을 받았거나 황제의 명을 직접적으로 받드는 중신이 아니라 실권자의 심복정도로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고려시대에는 명문가출신으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문관들 중에서 선발되었고 내시=환관이 이니라 내시=현대의 비서실의 의미가 컸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환관이 내시부를 맡게 되면서 환관=내시의 개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흔히 환관은 고자었기때문에 내시는 고자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내시는 궁궐에서 죽을 때까지 생활한 것이 아니고 고령이 되면 파견명목으로 밖에서 말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내시=환관인 경우가 많았는데 춘추전국시대 제환공의 말년을 끝장낸 수초가 환관 내시였습니다. 사기를 기술한 사마천도 내시로 알려졌으나 원래는 일반관직을 수행하다가 죄인으로 몰려 궁형을 당해서 내시가 된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내시 즉 환관에 대한 여사를 찾아보면 고대 아시리아 페르시아 이집트 등지에서 거세 방법의 기록이 있는데 특히 전제주의 국가에서 왕은 한결같이 많은 후궁들과 시녀들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이를 효과적으로 보호하여 정절을 유지할수 있는 방법이 바로 거세였던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