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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4.01.22

신라와 당나라의 석문전투의 배경은 무엇인가요?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당전쟁으로 이어졌고

석문전투가 발발했다고 아는데

석문전투는 어떤 것이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서

문제가 되어서 발발한 전쟁인가요?

석문전투이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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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72년 신라와 당나라가 석문에서 벌인 전투입니다. 신라와 당은 황해도 서흥 일대에서 충돌했습니다. 앞서 당군우 평양으로 남하하여 진영을 구축한 후 황해도 일대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합니다. 672년 8월 당군은 한시성과 마읍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계속 남하하였습니다. 석문(황해도 서흥군 서흥면)에서 신라군이 당군과 싸워 크게 패하였으며 장수 7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석문전투 이후 신라는 전략을 방어로 삼고 전국에 대대적인 축성작업을 진행합니다. 신라가 전략을 수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한 전투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70년 3월 신라의 선제공격으로 나당전쟁이 본격화되었고 신라군의 설오유와 고구려부흥군의 고연무가 각각 1만씩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오골성을 공격하므로 당은 고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이근행을 연산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해 신라를 공격하게 합니다.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은 4만명으로 알려져있으며 이들은 671년 ~672년 사이 황해도로 남하해 평양에 주둔합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70년 3월 신라의 선제공격으로 나당전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은 4만명은 671년에서 672년 사이 황해도로 남하하여 평양에 주둔하였습니다.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이 당군을 공격하여 수천명을 목베었습니다. 당군이 패해 달아나자 석문까지 쫓아가 싸웠는데, 신라군이 크게 패하였습니다. 석문전투 당시 신라의 장창당(長槍幢)만이 따로 진을 치고 있다가 당군 3천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에 장창당의 전과를 부러워한 여러 부대들이 분산하여 주둔하기로 하였으며, 신라군이 분산하여 제대로 진영을 편성하지 못한 틈을 타 당군의 공격이 이루어졌고, 신라군은 크게 패하게 됩니다.

    석문전투는 신라의 중앙군이 대거 참가하였으나 당군에게 크게 패함으로써 신라의 전략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통일전쟁 끝에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했지만 당나라는 당초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려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발생한 전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