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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꿀벌11
정겨운꿀벌1122.12.27

광해군은 폭군이었나요? 아니면 성군이었나요?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그당시 중립을 하지말고 재빨리 여진족에 타격을 주었으면 낫지 않았을까요? 또한 궁전은 엄청 지었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폭군이 안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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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결국 서인의 인조반정의 빌미가 됩니다.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해준 재조지은을 저버렸다는 것이죠. 그러나 여진족의 후금이 강성해지고 그 후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청이 중원을 장악한 역사흐름을 봤을 때 외교로서는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인조가 즉위하고 친명배금정책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여진족의 금과 청을 조선이 막거나 제압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폐모살제는 또다른 반정의 명분이었습니다. 이는 북인과광해군이 정통성 부족으로 과도했던 측면이 커 보입니다. 궁 건설은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훼손된 것을 다시 지어야할 필요섬이 있었습니다.

    광해군이 반정으로 쫓겨났기에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상과가 분명있고 폭군이라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 안녕하세요. 권기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이 폭군이었다는 것은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가깝죠.

    선조가 도망을 갈때 광해군은 의병을 모으고, 직접 일본군과 전쟁을 하면서 민심을 얻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세자로 책봉되는 것도, 세자가 되어서도 왕의 자리를 위협 받았죠. 그만큼 세력이 약한 왕이었지만 사리판단이 빨랐기에 중립외교로 저물어가는 명과 적절한 거리를 두었죠. 하지만 결국 폐모살제, 명과의 거리두기 등으로 인조반정이 발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