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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까칠한호저17223.05.14

자유시 참변은 내부의 분열로 일어난 것인가요?

자유시 참변은 한국 독립군과 러시아군의 교전으로 피해를 입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제가 학창시절과 자격증을 취득할 때 강의 내용으로는 외부에 의해서 배신을 당했다는 뉘앙스로 배웠지만, 여러 사이트에서는 내부의 주도권 다툼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라는데 어떤 것이 맞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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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4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1년 6월 27일에 극동 공화국 아무르 주 자유시(러시아어명: 스보보드니) 인근인 수라젭카(Суражевка)에서 사할린 부대가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가 지휘한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게 진압을 당한 사건.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자유시 참변이라는 용어를 쓴다. 자유시에서도 벌어졌다고 교과서의 서술에 나타나 있으나 실제로는 수라젭카에서 발생했다.

    아래 서술은 2017년 국방부의 공식연구서 및 공식견해, 2010년 윤상원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부터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의 논문 등에 근거한다.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의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를 침략하였는데, 이 보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간도에 군대를 투입했지만,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대패하고 만다. 이후 일본군은 양민학살의 형태로 보복작전을 벌이면서, 간도의 동포들뿐만 아니라, 노령주2 연해주에 살고 있던 동포들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

    당시 소련은 혁명이후 내전 중으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과 반혁명파의 백군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백군 지원 명분으로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 한인 거주지역을 습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독립군은 적군에 가담한 후 적군이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로 이동했고, 연해주 한인무장세력은 볼셰비키 세력의 강화에 따라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집결했다.

    1920년 봉오동전투 · 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상황이 위태롭게 돌아가자 서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이청천의 대한독립단,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여러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던 독립군은 일단 중국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헤이룽장성주4 밀산(密山)에 집결했다.

    이들은 독립군 10개 부대를 통합 · 재편성하여 1920년 12월 병력 3천5백 명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는데, 3개 대대로 편성되어 사실상의 북간도주5 독립군 통일군단이 되었지만, 무장이 빈약했기 때문에 제3국으로부터의 군사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이에 고무되어 1921년 정월 소만 국경선을 넘어 시베리아 땅을 밟았다.

    김좌진은 이 때 소련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반대 이유는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어렵더라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간도 땅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독립군단은 다시 동쪽 이동하여 우수리강주6을 건넜고,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했다.

    출처: 나무위키 자유시참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유시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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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자유시 참변’ 또는 ‘자유시 사변’은 1921년 6월 28일 한인부대들과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이 자유시에서 무장충돌한 사건을 말한다. 이 결과로 수십명에서 수백명까지의 한인들이 사망했으며 독립운동이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냉전시기에는 이 사건이 러시아에서 발생하고 한 쪽이 주로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부대이었다는 이유로 공산당이나 러시아가 한인을 속여 독립군을 죽였다는 주장이 강했다.

    -출처: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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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현정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공산당 내부의 러시아파와 상해파의 권력투쟁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따라서 내부의 분열이라고 보는 게 맞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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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0년 10월 일본군이 간도 지역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독립군 부대를 공격하고 수천 여명의 한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간도참변(경신참변)이 일어났습니다. 간도의 독립군들은 월등한 군사력을 가진 일본군 정규 부대와의 정면 대결보다는 군사 역량을 보존하고 독립 투쟁의 장기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흑룡강성의 밀산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밀산에서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군단을 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며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 흑룡주의 자유시로 이동했습니다. 당시 극동 지역 각지에 흩어져 있었던 한인 무장 부대들도 단일한 대부대를 편성하기 위하여 자유시로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집결한 무장 세력의 수는 4,000여 명 이상을 헤아렸습니다.


    그런데 1921년 3월 하순 자유시에 집결한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 부대들은 러시아 공산당 극동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상해파 고려 공산당 계열의 대한 의용군(사할린 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원을 받는 이르쿠츠크파 계열의 고려혁명군으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양자는 재러시아 한인 무장 부대들의 지휘권을 놓고 대립하였습니다. 한편 자유시로 이동한 한인 독립군 부대의 상당수는 대한 의용군과 제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재러시아 한인 군대의 관할권이 극동공화국에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이관되면서 상황은 고려혁명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두 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설치하고 총사령관에 칼란다리쉬빌리를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고려혁명군정의회가 두 세력의 대립을 조정하는 데 실패하면서 칼란다리쉬빌리는 대한 의용군에게 무장 해제를 명령했습니다. 대한 의용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려혁명군정의회는 대한 의용군에 대한 무장 해제에 착수하였습니다.


    6월 28일 오전 1시 고려혁명군정의회는 극동공화국 자유시 수비대와 교섭하여 러시아 적군 4개 중대를 차출하였고, 여기에 고려혁명군이 가세하여 대한 의용군의 주둔지인 수라제프카로 진격하였습니다. 6월 28일 고려혁명군은 수라제프카를 포위하고 대한 의용군에 대해 공격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부대 지휘권 양도를 거부한 한인 독립군 부대들도 같이 무장 해제를 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대한 의용군과 한국 독립군 부대들은 심각한 피해를 당했습니다. 피해 규모는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사망 36명, 포로 864명, 실종 59명이라는 자료도 있고, 사망 272명, 익사 31명, 실종 250명, 포로 917명이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습니다. 이렇게 무장 해제된 독립군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자유시를 탈출하고 만주로 돌아오게 됩니다. 자유시 참변은 사회주의 운동의 파벌 갈등이 빚어낸 사건으로 그 과정에서 만주 지역 한인 독립군의 무장 역량을 크게 손실시킨 일대 비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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