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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
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23.02.11

팔공산 전투는 어떠한 전투 였는지요?

역사관련 공부를 하다가, 팔공산 전투를 알게 되었는데요.

팔공산 전투는 어느시대, 누구와 누구가 전투를 하게 되었는지요?

어떠한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일어난 전투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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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927년(고려 태조 10)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

    일대에서 후백제견훤(甄萱)과

    태조 왕건(王建) 사이에 벌어졌던

    큰 전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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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팔공산 전투는 927년 9월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대파한 전투 입니다.

    이 무렵 고려와 후백제는 힘들여 맺은 강화가 깨지고 다시 전운에 휩싸이고 925년 가을 조물군전투에서 약세를 느낀 견훤은 조카 진호, 고려는 왕건의 사촌동생 원윤 왕신을 인질로 보내어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926년 4월 진호가 죽자 견훤은 왕신을 죽이고 웅진방면으로 진군하여 사실상의 강화는 결렬됩니다.

    927년 고려와 후백제의 변방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들이 계속 되었고 후백제는 근암성, 고울부 등지를 공격하고 9월에 신라의 경주를 습격하여 포석정에 있던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는 등 자신의 세력과 영향력을 키워나갑니다.

    공산은 지금의 대구 부근의 험준한 산으로 전투상 중요한 요충으로 927년 9월 왕건은 견훤의 경주 진출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조문과 제사를 치르게 하고 바로 군사를 동원합니다. 왕건은 친히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으로 가고 고려군과 후백제 양군이 대치한 곳은 동수지역으로 양군은 이곳에서 대접전을 전개합니다.

    처음 고구군에게 전세가 불리하게 진행되어 견훤의 군사가 왕건을 포위하고 왕건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되었는데 이때 고려군의 신숭겸과 김락은 앞장서 힘껏 전투를 전개하였으나 후백제군의 공격으로 국왕 왕건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신숭겸은 왕과 자신의 옷을 바꾸어 입고 죽음을 당하고 왕의 생명을 건졌다고 합니다.

    전투가 끝난 뒤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하는데 목이 잘려 없어서 그의 몸에 있었던 점을 보고 식별하였고 왕건은 겨우 목숨만 부지한채 탈출하였고 고려군은 참패를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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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민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팔공산 전투는 공산 동수 전투라 하며 후삼국 시대인 927년 신라 공산(현 팔공산) 동수에서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치른 전투로 견훤이 왕건군을 기습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고 이곳에서 신숭겸 등 8명의 장수가 전사해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반야월 등 대구의 대표 지명들이 이 전투에서 생기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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