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과 견훤의 전투인 팔공산 전투는 왜 일어난 것인가요?
왕건과 견훤의 전투로 알고 있는 팔공산 전투는 왜 일어난 것인지 궁금합니다.
왕건과 견훤의 전투에서 누가 승리하였는지도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을 통일하고자 야망을 가진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침략 할 틈을 노리고 있었지만 고려가 신라와 화친정책을 펴고 있어 고려와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서기 927년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지금의 팔공산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전투는 후백제의 승리로 끝났으며, 왕건은 이 전투에서 아끼던 장수를 들을 잃고 겨우 살아 남았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기 927년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팔공산) 일대에서 벌인 전투로 후백제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전투 이후 고창 전투(930년) 직전까지 후삼국 시대의 형세는 후백후가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918년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합니다. 초기에는 서로가 사신을 교환하는 등 고려와 후백제는 별다른 동요없이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견훤은 숙원이었던 신라 공격에 매진하느라고 고려 쪽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건국 초기 온갖 변란으로 혼란스러웠던 고려에는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하지만 왕건과 견훤 모두 삼국통일의 야망을 가지고 있는 군웅들이었기에 충돌은 불가피했고 잠시 시간이 지난 후에 본격적인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왕건과 견훤의 대결은 조물성전투로 후백제가 우위를 점하기는 했으나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고 일단 왕건과 견훤은 인질을 교환하고 강화에 동의하지만 후백제 인질인 진호가 1년 만에 병으로 숨지자 후백제 견훤은 왕건이 진호를 주살한 것으로 확신하여 왕신을 죽이고 강화를 파기합니다. 이에 분노한 왕건은신라와 연합하여 견훤에 맞서 싸웁니드ㅡ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27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일대에서 후백제견훤과 태조 왕건 사이에 벌어진 전투 입니다.
당시 여러 호족들 중에서 양대세력으로 성장한 후백제의 견훤과 태조는 외교상 화친을 맺고 있었으나 양자의 대결은 필연적이었습니다.
견훤은 그즈음 신라를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었고 927년 9월 근암성을 빼앗고 이어 고울부를 공취한 뒤 경주로 군사를 밀고 나갑니다. 이에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자 태조는 곧 몸소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태조의 원군이 이르기도 전 후백제군은 경주를 함락, 후백제군은 영천에서 신령-화산-호당-도동-임포-아화-건천-모량을 거쳐 경주로 진입, 경주에 들어간 견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경애왕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뒤 왕족 김부를 세워 왕위에 올리니 이가 경순왕입니다. 견훤은 경순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 등을 포로로 하고 각종 보물과 기술자 등을 약탈하기 위해 귀환길에 오릅니다.
이때 태조는 신라에 사절을 파견해 경애왕의 죽음을 조문하고 정기 5000명을 거느리고 내려와 대구 동남쪽에 위치한 공산 동수에 대기하고 있다가 경주에서 철수하는 후백제와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은 크게 패해 장군 김락과 신숭겸 등이 죽고 많은 군사가 전사, 태조도 간신히 몸을 피합니다.
이 전투를 시발로 두 나라의 대결은 첨예화되었으므로 종래 표면상 유지된 양군간의 평화는 깨지고 무력충돌이 심화되어 후삼국사 전체를 통틀어 보면 통일전쟁이 가속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팔공산 전투(927) 지금의 대구 광역시 팔공산 일대에서 후백제(견훤)과 고려(왕건) 사이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당시 신라는 견훤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몸소 원군을 이끌고 경주로 향하였지만 후백제군이 먼저 경주를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하였으며 경순왕을 세우고 철수하였습니다.(포석정 이야기)
뒤 늦게 경주에 도착한 태조 왕건은 신라인들의 슬픔을 애도하고 되 돌아오던 중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후백제의 견훤군과 일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러나 견훤군에게 대패하고 왕건은 신숭겸의 살신성인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바꿔 입음)
팔공산 전투에서 승리한 백제는 경상도 일대를 장악하고, 패권을 잡을 수 있었으나 신라와 고려가 친밀해지고, 호족들의 반발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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