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일제는 정말 과거 너무나도 커다란 돌이킬 수 없는 잘못들을 우리에게 일삼았는데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폐기하고 조선 정부에 친일내각을 구성시킵니다.
전쟁에서 북양군을 와해시킨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조선의 자주, 독립 및 요동 반도와 타이완 섬 할양 그리고 전쟁배상금을 받아내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 3개 열강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합니다.
그 동안 러시아와 우호적인 외교를 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수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자주 불러 조-러 간의 공조를 논의하며 인아거일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이에 따라 친일내각에 대한 축출을 단행, 일본 공사관 및 일본인 고문단의 지지를 받던 어윤중, 김윤식 등 친일 성향의 관료들이 고종과의 마찰, 박영효가 주도한 조의연 파면 등에 책임을 물어 축출되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러 성향의 관료들이 중용됩니다.
그러자 친일 대신이었던 박용효는 명성화우가 자신의 숙청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뒤 명성황후의 암살을 모의하지만 이후 을미사변에 가담하는 유길준의 내부 고발로 인해 실패해 일본으로 도주하고 박영효가 명성황후 암살미수사건 혐의로 수배되면서 상당수 친일관료들이 중앙에서 쫓겨나 일본의 입지가 좁아집니다.
망명한 박영효의 말에 따라 일본은 조-러 간의 비밀협약 의혹을 신빙성있게 여기고 이에 따라 일본의 향후 외교방침 전환을 위해 이토내각과 정계 , 육해군부 내에서 갑론을박이 오갔는데 이때 유신지사이자 당시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오랜 정적이었던 다니 다테키의 추천을 받아 새로 조선공사로 부임한 퇴역 육군 중장 미우라 로고가 조-일 외교의 전면에 등장해 배후로 추정되는 일본 당국 관계자들은 미우라고 하여금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 국면을 전환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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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는 러시아의 베베르공사를 자주 불러 국사를 논의하는 등 연대를 강화해나갔고, 이에 소외감을 느낀 일본은 러시아를 우대하는 조선국모 명성황후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결국 명성황후 제거계획을 세운다.
-출처:티스토리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일전쟁의 진행과정에서 일본이 조선에서 추구한 정책 목표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처하는 데에 필요한 전략적 시설을 확보하고, 강화도조약 체결 이래 구축된 불평등조약체제를 한층 강화하면서 본원적 자본축적에 필요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며, 나아가 궁극적으로 조선을 일본의 보보호국으로 약취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서울주재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츠지(內田定槌)에 의하여 처음 표출된 일본의 조선보호국화방안은 7월 23일의 경복궁점령 소식에 접한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외상의 立案으로 8월 17일 내각회의에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정책목표로 설정되었습니다.
이 결정에 따라 오오토리공사는 조선정부로 하여금 내정개혁, 즉 갑오경장을 실시하도록 권고하는 한편, 8월 20일에는 경부·경인간 철도부설권 및 군용전신선관할권 등의 이권을 일본에 양도함을 보증한다는 내용의<朝日暫定合同條款>을, 26일에는 전쟁 중 조선이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일본군의 진퇴와 그 식량준비 등을 위하여 편의를 제공한다는 내용의<朝日盟約>을 각각 체결하였습니다. 그리고 15일과 26일에는 일본고문관과 군사교관을 조선정부내에 배치토록 하는 내용의 약속을 조선정부로부터 받아냈습니다. 이로써 일본정부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확보한 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열강의 간섭과 조선인의 반발을 우려한 나머지 당분간 이들 조약의 즉각적인 실현을 요구하거나 급격한 제도개혁의 강요를 삼가는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 당시 집권하였던 김홍집, 유길준 등 개화파 관료는 군국기무처라는 국정개혁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내정개혁을 추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조선정부에 대해 적극간섭정책을 펴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명치유신의 원훈이자 현직 내무대신인 이노우에를 조선주재公使로 발탁하여 서울에 파견한 것입니다. 이노우에공사는 조선의 보호국화라는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고종과 박영효 중심으로 친일정부를 조성하고 조선정부내 일본인 고문관 배치, 조선정부 제도의 일본식 개혁, 조선정부와 일련의 신조약 체결, 그리고 500만 엔의 정치차관 공여 등을 골자로 하는 적극적 내정개혁작업에 착수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이노우에공사는 500만 엔 차관을 공여함으로써 조선을 영국치하의 이집트와 같은 실질적 보호국으로 만들 것을 구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차관은 1895년 2월 하순에야 일본정부에 의해 300만 엔으로 그 액수가 감소·책정되었습니다. 차관제공이 시간적으로 지체된 데다가 그 액수도 원래의 기대치보다 적었으며, 차관공여의 조건이 불리하였기 때문에 이 300만 엔 차관은 박영효 같은 조선측의 ‘애국적’ 집권자들의 반발을 초래함으로써 오히려 역효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청·일강화의 조짐이 분명해진 1895년 2월 중순부터 러시아의 對韓간섭 움직임이 나타나자 전쟁종결외교에서 요동반도의 할양에 치중하기로 결심한 무츠외상은 2월 27일 러시아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명실공히’ 보장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사실상 전쟁기간 일본이 조선에서 추구하였던 보호국화라는 정책목표를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삼국간섭 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일본정부는 이노우에공사를 경질하고 그의 후임으로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 고로오(三浦梧樓)를 선발, 파견하였습니다. 서울 부임 후 미우라공사는 조선에 대한 장기적인 지배권 확보조처로서 스기무라서기관 등과 閔妃(明成皇后)弑害를 음모하였습니다. 그 결과 1895년 10월 8일 미우라공사는 일본군·순사·장사 등을 동원, 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난입하여 민비를 시해한 다음 불태워버리는 만고에 유례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민비시해사건을 계기로 조선인의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또 관계 열강의 비난이 세차게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곤경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때에 집권한 친일적인 김홍집내각이 12월 30일 단발을 선포·시행하자 곳곳에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기화로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자신의 거처를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의 친일정권은 삽시간에 붕괴되고 일본은 조선에서 정치적·군사적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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