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시대에 강홍립의 최후는 어떻게 됬나요
안녕하세요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하면서 강홍립과 2만대군을
명에 파병하고 청에 항복하도록 하였는데 강홍립과
2만대군은 어떻게 됬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금(後金)이 명나라 변경을 침입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자,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해왔습니다. 조정에서는 후금을 의식하면서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병을 보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출병을 결정했습니다. 강홍립은 오도원수(五道元帥)가 되어 부원수인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000여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였습니다. 1619년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과 관전(寬甸) 방면에서 합류해 동가강(佟佳江)을 따라 회인(懷仁)에서 노성(老城)으로 향했습니다.
이들 조 · 명 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해 앞뒤에서 적을 협격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작전에 차질이 생겨 부차(富車)에서 대패했습니다. 이때 강홍립은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했습니다. 이는 출정 전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한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조정에서는 강홍립의 관직을 박탈했습니다. 투항한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김경서 등 10여 명과 계속 억류당하다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로서 입국해 강화(江華)에서의 화의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했고 죽은 뒤에야 복관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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