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의 정치적 배경과 영향력은 어떠했나요?
고구려의 적대국으로서의 역할과 고구려 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무열왕의 업적과 한계도 궁금하고요 상세하게 답변바래봐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 제29대 왕(603~661),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은 왕.
무열왕 김춘추는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았으며 왕권 강화에 힘을 쏟았다.김춘추는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였고, 김유신은 가야 왕족인 김해 김씨로 신라의 진골이 되었다. 진골에 들어간 김유신 집안은 다른 귀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상황을 살피던 김유신은 왕족인 김춘추와 손을 잡아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그래서 여동생인 문희를 김춘추에게 소개시켜 결혼에 이르게 했고, 둘의 결속은 더 강해졌다.
한편, 의자왕이 즉위하면서부터 백제는 신라를 더 강하게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김춘추는 딸과 사위를 잃고 엄청난 충격을 받아 지나가는 사람도 알아 보지 못할 정도였다. 정신을 차린 김춘추는 백제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구려와 협상을 맺어 함께 백제를 압박하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당에 도움을 청했다. 고구려를 꺾을 생각에 골머리를 앓던 당 태종은 김춘추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신라와 고구려를 쓰러뜨리고 동북아시아의 권력을 장악하려는 당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 이북의 땅은 당에게 넘겨준다는 비밀 약속을 하고 나당 동맹이 성사되었다.
진덕 여왕을 마지막으로 신라 사회에서 성골은 사라졌다. 진골 귀족들은 화백 회의를 열어 자신들 중에서 유능한 자를 임금으로 뽑기로 했다. 그때 가장 왕이 될 만한 진골은 '알천'이었지만, 그는 군사력이 없었다. 반면, 나당 동맹을 성사시킨 김춘추는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유신의 지원을 받아 왕이 될 수 있었다. 드디어 진골 출신의 첫 왕인 태종 무열왕이 탄생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열왕 김춘추 (한국사 개념사전, 2015. 02. 24., 최인수, 공미라, 김수옥, 김애경, 김지수, 노정희)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종무열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54~661년이다. 이름은 김춘추로 진덕여왕 사후 신하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을 열었다. 즉위 전부터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를 직접 오가며 탁월한 외교역량을 보여주었고, 김유신과 연합하여 신귀족세력을 형성하여 보다 강화된 왕권 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친당외교를 통해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의 토대를 마련한 후 재위한 지 8년 만에 사망했다. 시호는 무열이고 묘호는 태종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의 제29대 국왕.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와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 사이의 아들로, 선덕여왕의 조카이다.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 골품제라는 신라의 특수한 사정상 즉위 직전까지 태자 및 후계자가 아니었으며, 마지막 성골인 진덕여왕이 승하한 후 화백회의의 합의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교관, 정치가로 활발하게 활동해서 태종 무열왕이라는 묘호와 시호 외에 본명인 김춘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신라의 정치사로 보면 제36대 혜공왕 대까지 이어지는 신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신라 중대 왕실의 시조격이 되는 임금이기도 하다. 태종 무열왕은 그의 행보와 업적에 대해 후술되어있듯 여러 상반된 평가들이 나오고 있지만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7세기 당시 김춘추를 빼고 한반도 정세를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할 정도로 핵심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라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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