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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큰고니27
밝은큰고니2723.04.29

화랑세기는 위서인가요? 아니면 실제 필사본인가요?

김대문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 화랑세기는 현재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는데요, 이 화랑세기가 위서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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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시대 화랑을 다룬 사서. 신라 중대의 진골 역사학자 김대문이 저술하였으며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신라의 왕호에서부터 각 화랑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인용되어있다.

    적어도 고려시대 후반, 화랑세기가 편찬된 시점에서 500여년이 지난 원간섭기까지는 원본 화랑세기가 존재했다는 것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서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서적에서는 이미 화랑세기가 실전되었다는 언급이 있는 만큼 이 무렵 이미 사라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후술된 필사본 화랑세기의 위서 논란 때문에 환단고기 비슷하게 오인되어 '화랑세기란 책 자체가 위서다'라고 주장, 설명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후술된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서일 수는 있어도 신라시대에 쓰여진 '화랑세기'라는 책 자체는 실존했던 역사책이 맞다. 다만 현존하지 않을 뿐이다.

    출처: 나무위키 화랑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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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용수 혹은 용춘은 김춘추의 아버지인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용수와 용춘이 동일인물이라 기록하나 필사본에는 용수와 용춘이 형제지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용수의 사망시기에 대한 필사본의 기록은 황룡사탑의 중수기에 보이는 용수의 사망시기에 대한 기록과 배치됩니다. 선덕여왕 즉위 후 용수는 생존했었음을 알수있는 반면, 필사본은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 용수가 죽었고 그 처와 아들을 아우 용춘이 부양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 총 420명 중 다른 사료에서 나타나지 않고 필사본에서만 보이는 인물은 240여명인데, 신라 금석문에서 독자적으로 확인되는 인물이 없는 반면 타 사료에서 발견되는 180명 중 24명은 금석문에서 확인이 되었고 필사본에서 신라 왕을 제나, 대제라 하지만 이 역시 금석문에서 찾아볼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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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까지는 가짜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듯이 진짜임을 확인해 주는 증거도 없다.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원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결론이 유보되고 있는 상황이다. 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사실 진실여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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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화랑세기는 김대문이 집필했다는 진본이 없는 상황에서 진위 논란을 불러왔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용어가 기록돼 있다는 점에서 당시 상황이 반영된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는 반면, 일부 역사학자는 당나라 이후의 어휘가 많이 사용됐다는 사실을 제시하며 위작으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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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9년 2월16일 부산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공개되었다. 32쪽짜리 이 필사본이 만약 ‘삼국사기’에 언급된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맞다면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보다 무려 460여년이나 이른 기록이다.

    남당 박창화(1889~1962)가 1933년 일본 궁내성 도서료 촉탁직으로 일할 때 필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료는 비록 필사본이지만 내용 면에서 ‘국보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출처: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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