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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낙타174
순수한낙타17423.07.18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운 김구선생은 왜 암살당했나요?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우고 영웅으로 대접받아도 모자랄텐데

독립 후에 김구 선생은 왜 암살을 당하게 된 것인가요?

그를 암살한 세력은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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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구 암살 조직은 서북청년회원 홍종만 등 4명으로 구성된 팀과 안두희·오병순 등 군인팀이 있었습니다. 안두희는 서청 회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홍종만이 한독당에 들어간 것은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두희는 1949년 1월부터 정보장교 김창룡으로부터 김구에게 접근하라는 지령을 받고 2월경 한독당에 입당했습니다.
    안두희·오병순 등에게 직접 지시를 내린 것은 포병 사령관 장은산이었습니다. 장 중령은 6월 23일과 25일 두 차례에 걸쳐 김구 살해 기도가 실패하자 안두희 등 군인 네 명을 기합주고, 안두희에게 단독범행을 지시했습니다. 장은산은 친일 정치브로커 김지웅과 연결되어 있었고, 김지웅은 홍종만 팀 중심의 암살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구 살해의 배경으로는 미국도 논란의 대상입니다.

    미국은 1945년 연말 김구가 미군정청 총파업이 포함된 반탁투쟁을 전개할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5·10선거를 반대하고 남북협상에 적극 참여하면서 양자의 균열은 더욱 깊어갔습니다. 미국은 정부가 선 이후 통일운동을 펴는 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뒤흔드는 매우 위험한 행위로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었습니다. 그는 특수업무를 맡은 미군 중령 등을 만났는데, 그들은 김구를 국론 분열의 암적 존재로 얘기했고, 살해해야 한다는 암시를 주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태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구암살은 미스테리속에서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세력을 이루던 이승만정권의 갈등설과 미국의 인발브등 많은 설이 있지만 밝혀진 것은 없는 상황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약수 등 7명이 모두 검거된 다음 날인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36분 포병 소위 안두희가 경교장에 나타나 김구를 살해했다. 74세에 불의의 변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은 20세기 말까지 끊임없이 논쟁이 제기되었다.


    살해 현장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헌병대가 돌연히 출동했다. 군인들은 서대문경찰서장의 현장 접근을 차단했다. 즉각 달려온 서울지검 검사장 최대교도 군인들이 보안상 출입시킬 수 없다고 막는 바람에 승강이만 벌였다.


    김구를 언제부터 살해하려고 했을까? 김구 암살 조직은 서북청년회원 홍종만 등 4명으로 구성된 팀과 안두희·오병순 등 군인팀이 있었다. 안두희는 서청 회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홍종만이 한독당에 들어간 것은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이었다. 그리고 안두희는 1949년 1월부터 정보장교 김창룡으로부터 김구에게 접근하라는 지령을 받고 2월경 한독당에 입당했다.


    안두희·오병순 등에게 직접 지시를 내린 것은 포병 사령관 장은산이었다. 장 중령은 6월 23일과 25일 두 차례에 걸쳐 김구 살해 기도가 실패하자 안두희 등 군인 네 명을 기합주고, 안두희에게 단독범행을 지시했다. 장은산은 친일 정치브로커 김지웅과 연결되어 있었고, 김지웅은 홍종만 팀 중심의 암살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에는 국회프락치 사건에도 개입되어 있는 헌병대 부사령관 전봉덕이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장은산이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전봉덕이 작전을 진두지휘했다는 증언도 있는데, 헌병대는 사건 발생 이전에 경교장에 출동했다. 전봉덕은 사건 발생 1시간 24분 만에 이 사건은 단독범행인 것 같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 사건 직후 헌병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앞서도 김창룡이 언급되었지만, 안두희는 헌병대에서 곧 특무대로 넘어갔는데,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김창룡과 김지웅이 오자마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장은산·전봉덕·김창룡의 위에는 육군 총참모장인 채병덕이 있었다. 채병덕은 특무대 사무실인 대륙공사로 와 안두희 사건을 취급하지 말라고 지시해 김안일 특무대장은 전혀 손을 댈 수 없었다. 안두희를 기소한 육군 검찰한테도 이래라저래라 지시했다.


    김구는 이전과는 달리 1948년부터 강력히 친일파 숙청을 주장했고, 이승만과 반민특위가 날카롭게 맞섰던 1949년 2월에 반민특위 활동을 인민들이 찬양할 것이라고 치하했는데, 암살 관련자들은 거의 다 친일파였다. 장은산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고, 채병덕은 육군 중좌(중령)였다. 전봉덕은 해방 당시 조선인 8인의 경시 중 한 사람이었는데, 친일파를 처단한다고 하자 다른 고위 친일경찰처럼 군대로 도피했다. 김창룡은 관동군 헌병 오장(하사)으로 그의 악질적 행위는 매우 유명했다. 안두희 사건 재판관 원용덕은 관동군 중좌였다. 그는 후에 헌병 총사령관으로 특무대장 김창룡과 함께 이승만의 총애를 받기 위해 여러 사건에 끼어들었다.


    김구 살해 사건이 오랫동안 한국인한테 지대한 관심을 모은 것은 누가 최고 배후냐는 문제 때문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승만이 지시를 내렸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초기부터 배후로 지목되었지만, 이 사건은 신성모 가지고는 풀리지 않는 것이 많았다.


    사건 당시 이승만의 동태에 대해서는 꼬장꼬장한 법조인 최대교의 증언이 흥미롭다. 최대교 검사장은 경교장에서 헌병들과 티격태격하다가 권승렬 법무장관에게 연락해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범석 국무총리를 찾아갔더니 ‘수렵 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겨울도 아닌 한여름에 꿩 사냥을 갔다는 것이다.

    권 장관과 최 검사장은 신 국방장관을 찾았다. 그랬더니 병환이어서 면회가 안 된다는 것을 우겨서 병실로 들어갔다. 신 장관은 전혀 병색이 없는 얼굴로 얘기를 듣더니 엉뚱하게도 “이제 민주주의가 되겠군” 하고 말했다. 그런데 셋이서 경무대로 갔더니 대통령은 아침부터 낚시를 떠나고 없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다음 날 최 검사장은 놀라운 일에 직면했다. 아침에 출근하자 한격만 서울지방법원장으로부터 김학규 조직부장 등 한독당 간부 7명에 대해 살인교사죄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익진 검찰총장이 영장을 신청했다는 것이다. 하루 만에 한독당 간부들을 담당검사도 모르게 총장이 영장을 신청하고 법원장이 발부한 초법적인 사태에 최 검사장이 총장한테 따졌다. 김 총장은 경무대 쪽을 가리키며 “저 영감이 망령이 들어 이런 짓을 했나보네. 최 검사장 모르게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해서”라고 변명했다. 이 일로 최대교는 항의사직서를 냈다.


    안두희도 이승만의 동태에 대해 증언했다. 그는 1949년 4월 포병사령부 사격대회에 이 대통령이 예고 없이 참석해 시상한 일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안두희 등이 한독당에 입당한 것이 속이 빤히 보이는 행동인 것처럼, 이승만 정권이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 등 한독당 간부들을 안두희를 입당시켰다고 하여 구속시킨 것은 속이 빤히 보이는 행위였다. 이 대통령은 7월 2일 경교장 문상 행차 전에 낸 담화에서도 김구 살해는 “순수히 여하한 행동노선이 조국을 위하여 가장 유리할 것인가에 관한 당내 의견 차이의 직접적 결과”라고 주장했다.


    김구 살해의 배경으로는 미국도 논란의 대상이다. 미국은 1945년 연말 김구가 미군정청 총파업이 포함된 반탁투쟁을 전개할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더욱이 5·10선거를 반대하고 남북협상에 적극 참여하면서 양자의 균열은 더욱 깊어갔다. 미국은 정부가 선 이후 통일운동을 펴는 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뒤흔드는 매우 위험한 행위로 보고 있었다.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었다. 그는 특수업무를 맡은 미군 중령 등을 만났는데, 그들은 김구를 국론 분열의 암적 존재로 얘기했고, 살해해야 한다는 암시를 주었다.


    미국이 김구 살해를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 살해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전반적인 진행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배후에서 버티고 있어도 의도대로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미국의 김구에 대한 악감정은 그가 죽자 미대사관에서 그를 무자비하고(ruthless) 파렴치한(unscrupulous) 기회주의자(opportunist)로 묘사한 데서 엿볼 수 있다. 미대사관에서는 김구 장례식에 40만 명이나 되는 인파가 몰려들었음을 기술하고는, 그런 애도 인파를 단지 부드럽고 공식적인 호기심(only mild and normal curiosity)이라고 묘사했다.


    김구 살해 사건에 대한 정부 발표는 이승만의 의중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7월 20일 군 당국은 한독당이 정부를 전복하려 했고, 소련의 주장에 따라 미군 완전철수 추진에 주력하자 안두희가 ‘의거’를 일으킨 것으로 발표했다. 김태선 서울시경 국장은 김구가 살해된 이후 한독당은 대통령, 국무총리 등의 요인 암살 계획을 수립했다고 비난하고, “민족진영의 탈을 쓰고 파괴 살상을 기도하는 사이비적 우국도배에 대해서는 좌익공산도배에 준하여 가차 없는 철퇴를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을 해왔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유일당 또는 여당이었던 한독당은 이렇게 와해되었다.


    김구는 왜 살해되었나? 김구는 소장파 의원 등 친일파 처단 등을 요구하는 민족주의자들한테 영향력이 있었다. 김구의 통일운동은 분단고착세력한테는 큰 두통거리였다. 그렇지만 이승만이 김구를 두려워한 데는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김구·김규식과 뜻을 같이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5·10선거는 거부했으나 1950년에 실시될 국회의원 선거에는 참여하고자 했다. 그 경우 국회 판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김구는 대통령 자리를 놓고 이승만과 겨룰 수 있는 최대의 라이벌이었다. 두 노인 모두 명분에 몹시 집착했는데, 김구는 이승만한테 명분과 현실정치 양면에서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김구의 죽음은 남한 전체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 한 신문은 장례식이 있기까지 10일간 빈소에 124만 명이 다녀간 것으로 보도했다. 장례식 인파는 40~5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한국 역사상 최대 인파였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때 신익희의 한강백사장 연설에 모인 사람이 20~30만 명이었으니 이 기록은 1950년대에도 깨지지 않았다. 7월 5일 장례식날 수원·청주·목포에도 수만 명이 모여 고인을 애도했다. 대전에는 당시 대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5만 명이 모였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을까?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애국자 김구, 서민적인 지도자 김구의 이미지도 작용했다. 김구의 죽음으로 통일의 길이 꽉 막히게 됐다는 느낌도 받았다. 폭압정치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김구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힘들고 어렵게 살았던 이 민족한테 크나큰 어둠이 온 것으로 비쳐졌다.


    김구 살해 후 보여준 안두희의 생은 현대사의 생생한 축소판이다. 1949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한 안두희는 범행 48일 만에 두 계급이나 파격적으로 특진했다. 그러나 8월 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5년형으로 감형되어 복역을 하게 됨으로써 대위 계급에서 파면되어 전역했다.


    재판정 풍경은 극우세력의 진면목을 보는 것 같았다. 법정 안에는 애국청년 안두희가 실지회복(失地回復)의 전초전을 감행했다는 삐라가 나돌았다. 극우세력은 김구를 살해한 것을 대북전쟁의 전초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법정 밖에는 안두희를 의사로 치켜세우는 벽보가 붙었다. 변호인은 변론에서 피고인의 행위는 대한민국에서 표창받을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검찰관이 반박하자 원용덕 재판장이 이를 제지했다. 안두희는 “국가를 위하여 선생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단정했다”라고 당당히 발언했다.


    6·25전쟁이 나자 안두희는 이틀 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전쟁 초기에 이승만 정부는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그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았다. 다시 장교가 된 그는 1951년 12월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군대에서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나중에야 안두희가 출옥했고 이례적으로 진급한 사실을 안 국회가 이를 문제 삼자 이 대통령은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고 잡아뗐다.


    1953년 안두희가 전역할 당시 계급이 소령인지 중령인지는 확실치 않다. 자유당 치하에서 안두희는 군납공장을 차리고 건설회사를 경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4월혁명으로 이 정권이 무너지자 그때부터 가면을 쓰고 쓰라린 도피생활을 했다. 다행히 1년 만에 5·16쿠데타가 일어나 다시 편안한 생활을 했는데,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또 쫓기기 시작했고, 붙잡혀 맞으면서 몇 번이고 자백을 강요당했다. 늙은 안두희는 외국으로 도피하려 했지만 그것도 막혔고, 그러다가 1996년 당시 버스기사 박기서한테 구타당해 생을 마쳤다.

    출처 : 이승만과 제1공화국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로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

    였으며,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습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