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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공주파리더
칠공주파리더23.11.09

임진왜란 이후 고니시 장군 가문의 최후가 혹시 좋지 않았나요?

고니시 장군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군들 중에서 그래도 현명하고 유화책을 펼쳤던 장군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종전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음에도 가문의 최후가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경위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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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니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벌인 내전에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해 잘 싸웠으나 임진왜란 당시 육로에서의 병력 소모와 이순신에 의해 대패하는 바람에 물자와 병력을 크게 상실해 7천 정도만 겨우 이끌고 참전합니다.

    또 3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이끈 우키다 히데이에도 가신단 대부분이 배신한 상황에서 본인은 원래 무능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ㅅ고, 결정적으로 총사령관이 지휘관으로써는 최악인 이시다 미츠나리였으니, 그냥 싸워도 패배할 가능성이 높았는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까지 겹쳐 결국 서군은 이에야스의 동군에게 말 그대로 전멸, 고니시 본인도 병력을 거의 다 잃고 후퇴하다 전장을 이탈한지 4일만에 도쿠가와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1600년 교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참수당합니다.

    숙적 가토 기요마사의 공격을 받고 있던 우토 성은 끝까지 버티다 고니시의 처형소식이 들어오자 항복하고 성을 지키던 고니시의 동생 유키카게는 할복합니다. 쓰시마 섬 도주 소 가문의 소 요시토시와 결혼한 딸 마리아는 세키가하라 이후 이혼당해 갓 낳은 아들과 함께 쫓겨났으며 아들은 모리 가에 의해 살해 , 이후 고니시의 가문은 멸문되었으며 고니시의 영지는 가토 기요마사가 소유합니다.

    고니시의 가신들 역시 많은 수가 가토가문으로 흡수, 고니시의 우토 성을 점령한 가토는 그 성의 망루 하나를 자신의 구마모토 성에 옮겨 설치하고 우토 망루라고 불렀다고 하나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우토 망루는 원래 있었고, 우토 성 출신 가신들이 있는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라 합니다.

    정작 사위 소 요시토시는 조선과의 외교관계 회복에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살아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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