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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06.24

세종대왕은 첫째가 아닌데 왜 왕이 된건지?

안녕하세요? 우리가 잘 아는 세종대왕은 첮째 왕자가 아니라고 하네요 옛날 왕들은 장자승계의 원칙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세종대왕은 첫째가 아닌데도 왕이 되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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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형들이 폐세자가 되고 나서 왕세자가 책봉되었다고 합니다.

    태종 8년(140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태종 12년(1412) 충녕대군에 진봉, 태종 18년(1418) 음력 6월 맏형 양녕대군, 제가 폐세자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음력 8월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종 이방원에게는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서 세 아들이 모두 죽고 다시 얻은 아들이 양녕대군 이제입니다. 태종은 어렵게 다시 얻은 아들이 기쁘고, 왕자의 난을 겪어 왕이 되었던 터라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장자인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그 이후 아들 둘을 더 낳았는데 효령대군 이보, 축령대군 이도입니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왕을 자질이 되지 않았던지 여러가지 비행을 일삼았고 태종의 여러 번의 경고에도 개선되지 않아 결국은 페위시키게 됩니다.

    그 이후 효령과 축령대군을 두고 세자 책봉을 저울질 하였고 결국에는 막내인 축령대군 이도를 세자로 책봉하고 그가 세종대왕이 된 것입니다.

    야사에는 양녕대군이 왕이 되기 싫어했고, 자신이 아닌 축령대군에 마음이 있으나 장자라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주려한다는 생각에 일부러 비행을 저질러 폐위되고, 동생인 효령대군에게도 태종의 마음이 축령에게 있으니 자리에 욕심부리지 말라 말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 증명된 바는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으로는 양녕은 한량이고 문제아였고, 효령은 너무 조용하고 술도 못하여 중국사신이 와도 술 한잔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융통성이 없어 군주로서는 부적합하다 판단하였고, 그에 비해 뛰어나다 판단된 축령이 선택되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대왕의 위로는 다섯명의 형이 있는데 앞의 세명은 어린 시절 요절했고,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에 이은 사실상의 3남으로 자랍니다.

    아버지 이방원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 쟁탈전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바로 세우려 했으나 결국 자식 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려야 했고, 태종은 양녕대군을 계속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양녕대군의 계속되는 망나니 짓에 포기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양녕대군의 비행으로, 장남이 아닌 이상 차남, 삼남인가는 상관 없어 세자 자리, 멀리 봐서 왕위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움직인 것으로, 유교사회에서 양대 계승 명분 중 적장자 계승이 불가능 하다면 남은건 택현으로 , 어질고 현명한 이를 선택하는 것으로, 차남인 효령대군 역시 왕위에 대한 욕심을 내보인 정황은 없어 절대적으로 결격사유가 있는 대군들을 제하면 장유유서로 보나 택현으로 보나 삼남 밖에는 답이 없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국왕은 총 27명이고 그 중에서 정상적으로 장자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7명 뿐입니다. 즉 30% 도 안되는 비율로 정상 적인 앙위 계승이 이루어 졌고 나머지 70%는 정상 적인 왕위 계승이 아니였습니다. 세종도 이에 해당하는 데 첫째 양녕 대군은 본인이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고 둘째 효령대군은 속세를 떠나 절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으며 그래서 셋째인 충녕 대군, 세종이 왕이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