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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7.08

고종황제가 러시아공사관 으로 도망간 것을 아관파천 일을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고종황제가 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저로 도망을 가는 부끄러운 역사가 있습니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 하는데 그 당시 어떠한 배경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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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청나라로부터 랴오둥반도 등지를 할양받으나 1895년 5월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열강들, 즉 러시아가 주동하고 프랑스, 독일이 연합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합니다.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인한 조선 측에서 러시아에 접근합니다.

    그동안 친일 세력에 눌려있던 명성황후 척족세력과 함께 유럽, 미국 공관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며 친미, 친러적 경향을 보이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 러시아공사 베베르 역시 미국 공사와 재한 미국인을 포섭하고 명성황후 세력에 접근해 친러 정책의 실시를 권유합니다.

    이에 친일 세력은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며 김홍집 내각이 붕괴, 후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매수 정책에 따라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지만 명성황후 세력과 친미, 친러파가 요직을 장악, 내각은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던 개혁 사업을 폐지하고 친일파를 축출합니다.

    또 일본에 의해 육성된 훈련대마저 해산당할 위기에 처하자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는 1895년 10월 8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

    그결과 세력을 만회한 일본은 친일 내각을 성립, 단발령 실시를 포함한 급진적인 개혁 사업을 재개하나 왕비 시해와 단발령 강행은 전국에 걸친 의병 봉기를 초래합니다.

    전국에 걸쳐 의병이 일어나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를 이용해 의병을 진압하려 하나 되지 않고,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 이로 말미암아 수도 경비에 공백에 생겼고 이 기회를 틈타 친러파 측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자 모의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의 명성왕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서 목숨에 불안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간 조선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 바로 아관파천이데 '아관'은 당시 러시아를 한문으로 아라사라고 했기 때문에 아라사 공관을 줄여서 아관이라고 불렀습니다. '파천'은 임금이 피란을 가는 것을 뜻하는데 당시 고종이 신뢰하던 관리들은 궁궐 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 관리들과 친러파 관리들이었고 이 중 이범진 등의 친러파 관리들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켰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