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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침팬지184
외로운침팬지18423.11.04

고려시대때에 거란과의 전쟁이잦았다던데 왜그런걸까요?

고려시대때에는 거란과의 전쟁이잦았다던데 왜그런건지가 궁금합니다. 혹시 아시는 전문가님계시면 답변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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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함입니다. 당시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송나라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와 송의 관계를 끊어놓지 않으면 언제든 불안해질 수 있다고 여겼죠. 그래서 거란의 침입이 시작되었습니다.


    거란은 일단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시켰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태도는 여전히 의심스러웠습니다. 더욱이 협상으로 땅까지 내줘버렸죠. 2-3차 침입은 이러한 이유와 맞물려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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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거란 전쟁은 993년 1010년 1018년 총 3차례에 걸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고려와 거란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교류가 빈번하게 이뤄졌습니다. 특히 거란의 3차례 침략은 우리 역사에 큰 충격과 변화를 주었습니다. 963년(성종 12) 10월 소손녕의 침입 1010년(현종 1) 11월 강조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요 성종의 직접 침입 1018년 12월 소배압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또 1015년 소적렬의 홍화진 침입도 있었습니다. 916년 거란족은 아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건국하고 922년에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했으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 태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거란을 금수지국이라고 부르며 적대적 태도를 보이고 북진정책을 폅니다. 942년 요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사신 30인은 유배를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어 죽게 만듭니다. 1차 전쟁은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왔으나 서희 장군의 담판으로 여진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확보하게 됩니다. 2차 전쟁은 요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으며 그 이유를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것이었으나 이는 빌미일뿐 송나라와의 관계 단절과 강동 6주를 되찾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싸움에서는 패배하여 현종은 나주까지 피신했으며 강조는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3차 전쟁은 현종이 친조한다는 약조를 지키지 않고 강동 6주 또한 돌려주지 않고 송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자 소배압의 10만 대군으로 공격해왔으나 홍화진에서 적을 치고 도망가던 거란군을 귀주에서 공격하여 10만명 중 살아돌아간 이는 2천여명에 불과할 정도의 대승을 거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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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워 건국 초부터 북진 정책을 추구하였습니다. 이에 태조는 서경(평양)을 북진의 전진 기지로 삼아 영토를 청천강 이북까지 확장하였습니다. 게다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친선 관계를 맺고자 접근해 왔지만 강력히 배척하였습니다. 오히려 발해 유민을 포용하고 거란의 사신을 유배보냈으며, 선물로 보낸 낙타를 만부교 다리 밑에서 굶겨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국제적 상황에서 10세기 후반 송이 건국되어 분열된 중국을 다시 통일하자, 고려는 송나라와 정치적·경제적 교류를 넓혀 가면서 발달된 문물을 수용하였습니다. 송도 만리장성 이남까지 진출해 온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긴밀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거란과 대립하는 형세가 됩니다. 그러나 고려가 송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거란을 배척하자, 송을 공격하려던 거란은 양국의 관계를 끊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려에 3차에 걸쳐 침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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