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도 세자는 영조의 두 번째 아들로, 후궁이던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첫 번째 아들인 효장 세자가 죽은 후 태어나 왕과 조정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사도 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 세자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친어머니에게서 떼어 내서 별도의 거처에서 키우게 했다고 한다.
그는 1년 만에 영조의 뒤를 이을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열 살이 되던 해에는 혜경궁 홍씨와 혼인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학문을 익혀 정치적인 안목이 높고, 자신이 지은 글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려서 소론의 영향을 받은 세자가 영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면 자신들이 불리해질 것을 걱정한 노론 세력은 세자의 잘못을 영조에게 과장하여 고자질했다.
이때마다 영조는 세자를 불러 꾸짖었고, 세자는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궁궐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결국 영조는 세자의 잘못을 적어 올린 상소문을 보고 크게 화를 내며 세자를 폐위한 뒤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다.
영조는 자신의 가혹한 행동을 뉘우치면서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결국 당쟁에 휘말려 희생양이 된 사도 세자는 나중에 그의 아들 정조에 의해 ‘장헌’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묘도 경기도 화성의 현륭원(융건릉)으로 옮겨졌다. 정조는 자주 능행을 하며 백성들에게 효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출처 : 한국사 사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