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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23.07.16

영조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영조와 사도세자는 부자지간으로 세자가 어린시절에는 다른 아버지와 아들처럼 사이가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그후 여러가지이유로 사이가 틀어지게되고 결국은아들을 뒤주에 갇혀서 죽게하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데 저렇게 가혹한 행동을 한것은 참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영조가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갇히게 하여 죽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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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도 세자는 영조의 두 번째 아들로, 후궁이던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첫 번째 아들인 효장 세자가 죽은 후 태어나 왕과 조정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사도 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 세자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친어머니에게서 떼어 내서 별도의 거처에서 키우게 했다고 한다.


    그는 1년 만에 영조의 뒤를 이을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열 살이 되던 해에는 혜경궁 홍씨와 혼인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학문을 익혀 정치적인 안목이 높고, 자신이 지은 글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려서 소론의 영향을 받은 세자가 영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면 자신들이 불리해질 것을 걱정한 노론 세력은 세자의 잘못을 영조에게 과장하여 고자질했다.


    이때마다 영조는 세자를 불러 꾸짖었고, 세자는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궁궐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결국 영조는 세자의 잘못을 적어 올린 상소문을 보고 크게 화를 내며 세자를 폐위한 뒤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다.

    영조는 자신의 가혹한 행동을 뉘우치면서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결국 당쟁에 휘말려 희생양이 된 사도 세자는 나중에 그의 아들 정조에 의해 ‘장헌’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묘도 경기도 화성의 현륭원(융건릉)으로 옮겨졌다. 정조는 자주 능행을 하며 백성들에게 효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출처 : 한국사 사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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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왕의 가혹한 학대를 견디지 못한 사도세자는 끝내 미쳐버려 대낮에 내관과 종들을 죽이거나 궁녀들을 겁탈하는 등 세자로서 절대보여서는 안될 온갖 범죄를 저지릅니다. 사도세자의 이런 범죄행각을 알고 격분한 영조는 끝내 정신병자가 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포기, 후계자로서 모자람이 없는 손자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하며 이에 방해만 되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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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영조는 사도세자 선을 자기 뒤를 이을만하다고 보지 않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산(후의 정조)이 후계자로서 자기 기대에 부응하자, 소위 세손이 뒤를 잇게 하기 위해 세자를 정치적으로 제거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세손을 위해 세자가 제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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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도세가자 자신의 정권을 위협할만한 반역자이다라고 생각했다고도 하고, 자기 아들이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이다라고 여겼다고도하고, 영조 본인의 아버지인 숙종을 암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도 합니다. 또 사도세자가 너무 똑똑해서 자기를 뛰어넘을까봐 두려워서 사전에 죽여버린거라고도 하고요. 아직 역사학사자들 사이에서도 결론이 난것은 없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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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체적으로 정쟁의 결과라고 역사학계에서 보고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기간 나주 벽서 사건을 처리하면서 노론에게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았습니다. 사도세자가 소론을 처벌하자는 노론의 주장을 거부하고 소론을 지지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집권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것이 경종독살설입니다. 그 정통성에 대해서 재임 기간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노론은 이러한 독살설 관련자를 모두 잡아들여 죽여야 한다고 상소했지만, 대리청정을 맡았던 사도세자는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정쟁의 결과로 사도세자가 죽은 것으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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